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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Oct 21. 2024

아들의 태권도 승급심사가 내게 남긴 것

언젠가는 그렇게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모든 순간이 소중해진다

 어제는 아들의 태권도 승급심사날. 이틀 전부터 엄마가 꼭 오라며 신신당부하길래 피곤에 절은 얼굴로 살짝 심드렁한태도로 말한다.


 "이제 안가도 00이가 잘 하지 않아? " 나의 대답에 샐쭉해진 아들.  그래도 심사날이니 엄마가 꼭 와주면 좋겠다고 입을 뾰족이 내밀며 말하길래 살짝 미안해져 알겠다고 답을 주었다.


 5교시를 목이 터져라 수업한 후 잠시의 숨고를틈 없이 독후감 지도에, 둘째 유치원 입학설명회에 뺴곡한 스케쥴을 소화해내고 나니 온몸이 물기를 잔뜩 먹어 빨랫대에 축 늘어진 빨래처럼 축 쳐졌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스케쥴. 태권도 학원 승급심사 관전. 할 수만 있다면 내 몸을 복사 붙여넣기 해서 하나를 태권도 학원으로 던져넣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며 발걸음 무겁게 태권도 학원으로 향한다.


  축축히 젖은 거리를 조심스레 걸으며 그제서야 번뜩 생각이 든다.오늘 비가 왔는데 아들은 우산없이 어떻게 학원 버스를 탔을까? 1학기때만 해도 갑작스런 오후 비예보가 있으면 점심시간에 헐레벌떡 내려가 아들의 하교시간을 기다려 전해주곤 했었는데 오늘은 그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나도 이제 1학년 엄마를 졸업해가는 건가. 걱정을 했다가 비 조금 맞는 건 괜찮을거야 라며 스스로을 위안한다.


 태권도 학원에 도착하니 이미 승급심사가 진행중이었다.  지난 달과는 달리 학부모는 나밖에 없었다. 몇 차례의 승급심사를 거치면서 다른 부모들도 나처럼 살짝 맥이 빠지고 지루해졌나보다.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는 전년도 재고 떨이 판매대를 보는  심드렁한 기분일까? 어떤 일이든 처음이 가장 특별하게 다가오고 그 이후엔 다소 지루해지는 법이니까.


 애써 그런 감정을 감추고 나를 눈짓으로 훑는 아들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의 손짓에 살짝 얼어붙었던 아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먼저 다른 학년 아이들의 승급심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그동안 가져온 책을 읽으며 아들의 차례를 기다렸다. 한창 책에 빠져들었을 때 갑자기 한 아이가 다가온다.


 "00이 차례예요"


나는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켜 유리창을 응시한다. 아들이 심사를 위해 서있다. 아마도 아들의 차례를 놓치는 대참사를 막기 위해 관장님이 시킨  것 같다. 아들은 보라색 띠를 두르고 작은 몸으로 열심히 품새를 이어간다. 운동신경이 썩 좋진 않아 절도 있는 자세는 아니었지만 묵묵히 품새를 이어간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숨죽여 그 장면을 지켜본다. 이미 두번이나 봐왔지만 볼때마다 아들의 모습은 새롭다. 많은 아이들 앞에서 혼자 서서 긴장될 법도 한데 떨지 않고 해나가는 모습. 메말랐던 눈 주변이 살짝 촉촉해져왔다.


 아들에게 티는 안냈지만 잠시나마 심드렁한 감정을 가졌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승급심사를 보러 올 수 있는 것도 언젠가는 못할 일인데, 아까는 꼭 이 순간들이 영원할 것 처럼 여겼다.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두어야 하는 것들. 아이들의 어린 시절, 엄마를 찾는 이 순간들. 언젠가는 이렇게 못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니 갑자기 모든 순간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심사가 끝나고 우산을 쓰고 함께 집으로 가는 길. 아들은 엄마의 손 꼭쥐고 가는 길이 참 따뜻했는지 목소리에 들뜸이 묻어나온다. 다른 엄마들은 안왔는데 엄마가 와줘서 기분이 좋다며 가는 길에 편의점을 들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편의점 과자보다 엄마가 방문했다는 사실로 가슴이 충만해진 이 아이.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리고 속으로 작게 되뇌어본다.


" 다음 승급심사도 엄마가 갈게. 언젠가는 그러지 못할 일이니까 말야."



 아이들과 부대끼는 오늘 하루, 언젠가는 그러지 못할 일들을 자주 찾아 그 순간에 충실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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