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처한 문제상황과 감정을 먼저 알아차리는 일.
화창한 날씨탓에 기분좋은 금요일이지만 교실 안은 오늘따라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이런 날은 내가 꼭 동사무소의 민원처리 담당공무원이 된 느낌이다.
"선생님 쉬는 시간에 00이가 저한테 발로 찼어요" 부터 시작해서 "선생님 복도에서 00이가 뛰어서 저랑 부딪혔는데 사과도 안하고 지나갔어요"까지 쉴새없이 빗발치는 민원이 내 어깨에 짐처럼 쌓이고 또 쌓인다. 하나씩 어깨의 짐을 내려놓다보면 이미 내 팔은 너덜너덜해져 녹초가 된다. 5교시 후 점심을 먹고 올라와서 마지막 남은 짐을 땅에 내려놓으려는 찰나, 한 아이가 내게 와서 짐을 하나 더 얹는다.
"선생님 어제 하교 후 놀이터에서 00이가 저한테 뇌가 없다고 얘기하고 그네도 세게 밀고 때렸어요"
수차례 짐을 올리고 내리고 하느라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기 직전이었다. 내 몸이 비상상황을 감지했는지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이럴 땐 감정이 마음대로 내 행동을 쥐락펴락하면 안되니 심호흡을 크게 하고 속에서 나오는 내 감정을 알아차리기 부터 한다. "너가 지금 계속 연이은 민원처리에 지쳐서 화가 많이 났구나. 진정하고 얘기부터 들어보자" 라는 말로 내 속의 괴물을 살살 어르고 달랜다.
나는 아이에게 조용히 종이 한장을 내밀고 어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쓰고 그때 너의 기분,그 아이에게서 듣고 싶은 사과를 종이에 찬찬히 써오라고 시킨다. 아이는 종이를 받아들고 볼멘소리로 되려 내게 묻는다.
“쓸게 없는데요"
나는 그 말에 겨우 억누른 괴물이 다시금 튀어나올뻔 했으나 다시 호흡을 고르고 다시 들어가도록 안내한다.
"아까 네가 한 말 그대로 종이에 옮겨 적으면 된단다"
아이는 자리로 돌아가 내게 그대로 고해바친 자신의 억울한 일을 연필로 적어온다. 3분 후 가져온 종이에는 그 당시 자신의 감정과 사과받고 싶은 말이 빠져있다. 나는 묻는다.
"사과 받고 싶은 말과 네 기분이 빠졌어 다시 적어와"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는 퉁명한 말투로
"사과 안받아도 되는데요 선생님한테 말했잖아요"
그러자 나는 말한다.
"네 일이잖아. 선생님이 그 아이를 혼내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네가 그 아이에게 당당히 맞서서 해결하는 게 우선이야. 피하지 말고 네가 맞서서 얘기해야만 앞으로 같은 일을 안 당할 수 있어. 앞으로 네가 무슨일이 있을 때 마다 선생님이 늘 널 따라다니며 누군가를 대신 혼내줄 순 없잖아.그러니 다시 적어오렴"
그 말에 아이는 다시 들어가 자신의 기분을 쓴 말과 사과듣고 싶은 말을 찬찬히 써왔다. 아까보다는 훨씬 진정된 느낌이었다.
하교 후,피해를 준 아이를 불러 둘이 마주보게 세웠다. 아이는 그 아이에게 종이에 적힌 대로 기분을 말한 뒤 이 일에 대해 사과를 해줬으면 한다고 말을 전달한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피해를 준 아이도 그 아이의 표정을 거울처럼 보며 눈물방울을 달고 진심어린 사과를 전한다. "내가 너를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앞으론 안할게"
나는 아이들에게 한 번 더 힘주어 말한다.
"얘들아, 너희들의 문제는 먼저 너희들 힘으로 해결해봐야 해.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 선생님이 무턱대고 해결해버리면 그건 진정한 해결방법이 아니야.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면 불러모아 사과의 방법을 안내해 줄 순 있어. 그러니 우선, 너희들의 문제는 당당하게 의사표현을 해서 해결하려고 노력해봐야 해. 먼저 해보고 안되면 그땐 꼭 도움을 요청하렴"
아이들은 뭔가 깨달은 듯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내 문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나다. 어려운 상황이 오면 누군가에게 전가하거나 회피하려고만 들지 말고 우선 내안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하나하나 맞부딪혀 해결해보는 게 제일 우선이 아닐까? 자신 처한 문제를 입밖으로 말하거나 손으로 차분히 쓰면서 자신이 처한 문제를 명확하게 인지하는 일. 그것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단추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너희들이 첫단추를 잘 꿸 수 있는 안내자가 되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