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시간나누고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는 것
지난 토요일, 한 달전 핫딜로 끊어놓은 용평리조트에 세 가족이 모였다. 우연히 든 핫딜이 세 가족을 먼 용평까지 불러모은 셈이다. 여행을 직접 주도한 나로서는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였다. 숙소가 좀 오래됐다는데 불편하지 않을까? 조식은 입에 맞을까? 용평 너무 먼데 오는데 차도 막히고 힘든데 괜히 그때 리조트 예약을 잡았나 등 머릿속에 내 목소리가 쉴새없이 떠들며 나를 괴롭혔다. 여행도 가기 전 이미 신경이 잔뜩 곤두서왔다.
각자의 행선지에서 출발해 봉평의 한 메밀식당에서 조우했다. 단풍의 절정을 통과하는 이시기라 세 가족이 당면한 고속도로 곳곳은 정체가 심각했다. 차가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차안에서의 짜증 불만은 극에 치닫기도 했고, 가는 길에 화장실이 급해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는 단체관광객으로 몸살을 앓았다. 에버랜드 놀이기구를 기다리듯 한참을 기다렸다 겨우 화장실을 이용했으니 말이다. 고양에서 출발한 여동생네도, 대구에서 출발한 친정부모님네도 우리와 같은 사연을 품고 식당에 모였으리라.
막 당도했을 땐 모두의 표정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메밀전을 한 입씩 입에 가져가며 으음 감탄사를 연발할 때는 지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그다음 행선지인 양떼목장으로 안내했고 그 곳에서 우린 다시 모여 굽이굽이진 언덕을 걸으며 관광을 이어갔다. 거기서 내 머릿속에선 여러개의 목소리가 떠들어댄다. 특히 땡깡을 부리는 손녀를 안아야 하는 아빠를 보며 허리아프진 않으실까? 괜히 여길 와서 고생하시는 건 아닐까? 머릿속 수다쟁이가 만들어낸 이런저런 생각들로 다시 피로해진다.
머릿속 수다쟁이를 애써 모른 체 하고 숙소로 돌아간다. 각자의 보따리에선 다양한 음식들이 쏟아져나온다. 와인 과일 고구마 각종 과자 음료수 커피 등. 우리집 냉장고보다 리조트 냉장고가 더 풍성할정도로. 어쩌면 이날만을 기다린 것 처럼 그렇게 다들 양손 무겁게 오늘을 맞이한 것 같아 내 머릿속 수다쟁이들이 일순 자취를 감춘다.
다음날, 부모님의 단풍구경을 위해 야심차게 계획한 발왕산 케이블카를 위해 서둘러 리조트를 나선다. 이른시각부터 인산인해를 이루는 케이블카 매표소. 매표하는데 직원이 내게 묻는다.
“대기 시간 두시간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당황한 나는 몇 번이고 되물었다가 도돌이표 처럼 돌아온 그렇다는 답변에 전장에서 패배한 군인처럼 부모님께 슬픈 소식을 고한다. 그리고 재빨리 근처 뮤지엄으로 행선지를 돌려 미디어 아트를 구경하러 간다. 화려한 색채와 생동감과 역동감있는 아트에 부모님과 우리는 경탄을 연발하며 이곳저곳을 다닌다. 엄마는 케이블카보다 이곳이 낫다는 말로 잔뜩 졸아든 내 심장을 하나하나 펴준다.
뮤지엄 구경을 신나게 한 후 1층 카페에 앉아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에게 여기까지 왔는데 케이블카 못타고 단풍구경도 못하게 해드린게 못내 아쉽다고 말한다.
맥빠진 내 말에 엄마는 다음의 말로 나를 가슴 뭉클하게 하신다.
“장소가 뭐가 중요하노, 그거보다 얼굴 한 번 더 보는 게 중요하지”
그랬다. 여행내내 엄마는 손주의 얼굴을 빤히 보며 웃고 쓰다듬어 주시기도 했고,내 얼굴도 흘깃흘깃 여동생 얼굴도 흘깃흘깃하며 보는 엄마의 시선을 가을햇빛처럼 받았더랬다. 엄마아빠는 어쩌면 손주와 딸들의 얼굴을 실컷 보려고 다섯시간이나 넘는 긴 고행길을 묵묵히 올라오셨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 말 한마디가 내 가슴을 먹먹하게 울려온다.
내 머릿속 수다쟁이들은 어떻게 하면 엄마아빠를 기쁘게 해드릴까 신경쓰느라 그 순간 엄마아빠의 표정들, 우리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그 순간을 내내 놓쳐버린 것이다. 엄마의 말은 내게 깨달음을 주었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얼굴보며 마음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그러니 함께 하는 그 순간에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라고”
그리고 발왕산 케이블카가 2시간 대기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을만 되면 언제든 볼 수 있는 단풍보다, 뮤지엄에서 상어랑 거북이가 화면에 등장하니 신이난 표정으로 방방 뛰고 꺅꺅 소리를 질러내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지금 이 순간의 손주들의 모습을 눈과 카메라로 부지런히 담으며 웃으시던 친정부모님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걸 보면 말이다.
부모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을 부지런히 마련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 어제였다. 어디 거창하고 볼거리 많은 곳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