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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Nov 20. 2024

평일 건강검진이 내게 준 교훈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

 나는 매 11월이면 건강검진을 받는다. 31살에 위내시경을 하고 우연히 위에 안좋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 후 지금껏 숙제처럼 해오고 있다. 그래서 추운 냉기가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날엔 건강검진이라는 수식어가 자동으로 붙어 괜스레 몸과 마음이 조여온다. 밀린 숙제를 하자는 심정으로 예약을 잡으려는데 수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간호사 선생님의 안타까운 목소리

 "주말에는 예약환자가 많아서 혼잡해요. 그리고 이미 예약이 다 차서 주말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건강검진은 대부분 연말에 몰아서 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은 내 잘못이다.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굳은 결심을 한다. 절로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하나의 도전같은 그 일. 바로 평일 오후 건강검진.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수요일 오후 2시로 할게요"하는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대망의 오늘, 나는 평일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다. 최대한 목이 마른 순간을 소거하려 아침운동도 가뿐히 패스한다.아들딸의 아침으로 군고구마를 구우며 마른 침을 삼킨다.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이토록 슬픈말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하루 아침사이 나를 에워싼 공기가 무겁다. 땅에 내딛은 발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속은 바짝 타들어간다. 길에 늘어선 바짝 마른 나무를 보며 동질감을 느낀다. 다행히 오늘은 두시간의 쉼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까보단 조금 힘있게 교실 앞문에 들어선다.

 허기는 둘째치고 물을 못마신다는 생각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목이 타들어갈 때 마다 있는 힘껏 마른 침을 삼켜본다. 그렇게 물없는 하루의 서막이 열렸고 1교시 부터 난항이다. 한 선생님의 병가로 별안간 1교시부터 1학년 국어 수업을 들어가야 한다.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1학년 교실로 들어가 국어 수업을 불태운다. 마치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내 목소리는 갈기갈기 갈라진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교실. 2교시를 시작하려는 데 바깥에 자욱하던 안개가 내 눈으로 들어왔나보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아이들과 도덕수업을 이어간다. 다행히 영상을 보고 감상하는 내용이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3교시는 영어수업. 도망나오듯 연구실로 뛰어간다. 온몸에서 수분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느낌이 든다. 연구실 책상 위 놓아진 떡과 쿠키는 그런 나를 더 상심에 젖게 만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커피,차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약올리는 것 같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연구실의 냉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눈을 붙인다.

 종이 울리고 대망의 마지막 교시. 고지가 보인다. 인간은 희망이 있으면 고통의 순간도 기꺼이 버틸 수 있는 존재라고 했던가 갑자기 몸 어딘가에서 물이 샘솟아 온 몸 구석구석으로 수분을 공급해 활기가 도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러 비장한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간다. 오늘따라 나를 쳐다보는 26개의 눈망을이 어쩐지 애처로와서 눈물이 날 뻔 했다. 예전같았으면 수업종이 울려도 잡담하느라 바빴던 아이들이 서로를 향해 검지를 입에 갖다대며 나의 잔소리 한마디를 아껴준다. 그 모습이 퍽이나 사랑스럽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공허한 눈으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선생님은 물이 이토록 소중한 존재인지 처음 알았어. 어젯밤부터 지금껏 종일 물을 못마시고 음식을 못먹으니 이만큼 괴로운 일이 없어"

 나의 말을 들은 26개의 눈빛이 다시금 애잔하게 바뀌어 따스하게 나를 비춘다. 그 중 유독 애처로운 눈빛을 비추던 한 여자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저도 수술하느라 8시간 금식한 적 있었는데 너무 괴로웠어요. 그러다 수술끝나고 물 한잔을 마셨는데 입안에 물의 맛이 세세하게 느껴졌어요. 물이 이런 맛이구나.이렇게 달구나를 알았어요"

 나는 내 마음을 관통한 듯 한 아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강한 동의표시를 했다.

 나와 반아이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깨달음의 눈빛으로 책상 위에 놓인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괜스레 물을 벌컥 마셔보기도 한다.

 평일 오후 검진을 통해 나는 새삼 물의 소중함. 먹는 것의 소중함을 털끝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느낀다. 당연한 듯 주어지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들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진리를 말이다. 평소에는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것 처럼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결핍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것의 소중함을 절감할 수 있다. 평일 건강검진은 내게 물과 음식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좋은 결핍으로 작용해주었다.

 무사히 건강검진을 마치고 마신 한 잔의 물. 과히 우리 반 아이의 말대로 달고 시원하고 오묘하고 세상 최고의 맛. 그런 물을 언제든 마실 수 있음에 갑자기 행복감이 치솟는 오늘이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물 말고도 다른 어떤 것들을 또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가? 평온히 돌아갈 수 있는 내집. 그리고 나를 맞이해주는 아들,딸 그리고 남편, 저녁거리를 살 수 있는 돈.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치부하지 말고 감사해야 할 무언가로 생각하며 행복감을 가슴 속에 채우고 또 채우는 충만한 하루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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