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빠지는 오후, 나를 향해 건네는 메세지에 힘을 얻다.
학교생활 중 내가 무기력증에 빠졌다는 신호는 바로 아이들 일기검사를 미루는 것. 평소 일기를 걷자마자 바로 검사를 시작해 네댓줄의 댓글을 성의껏 달아주는 편인데 이번 주는 이상하리만치 힘이 빠져 교탁 한 귀퉁이에 쌓인 일기장이 시야에 들어올 틈도 없었다. 이주전 두 아이의 독감, 두 차례의 공모전 탈락, 그리고 이번 주 예정된 수술. 이 모든 것이 내 마음 속을 어지럽혔고 정신마저 혼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그런 와중에 한 시간의 쉼도 없이 6교시 수업을 어찌저찌 마무리하고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교실. 잠시 숨을 고르고 밀린 업무를 꾸역꾸역 해치워나간다. 한 차례 폭풍우가 지나간 듯 한 책상을 가지런히 정리하다보니 그제서야 시야에 아이들이 쌓아놓은 일기장 탑이 들어온다. 얼마 전 윌라에서 무기력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 한 구절이 번개처럼 뇌속을 뚫고 들어온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땐 그저 하나라도 한다는 생각으로 작게 시작하라. 아이들이 쌓아놓은 일기뭉치에서 나는 분홍색 표지의 일기장을 먼저 빼든다. 그 일기장을 먼저 빼든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일기장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반 한 여자아이. 오늘은 일기검사에서 글씨를 바르게 쓰세요. 느낀점을 꼼꼼히 써보세요.내용을 좀 더 자세히. 이런 조언의 글로 힘을 빼기 보단 아이의 글에서 힘을 얻고 싶은 날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여자아이의 일기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빼든다. 역시나 오늘의 일기에도 나를 향한 작은 응원의 메세지가 붙어있다.
"선생님 언제나 응원할게요"
짧막한 한 마디였지만 지금 이 순간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해주기엔 이보다 더 강력한 메세지가 있을까? 축 쳐져 내려간 어깨가 잠시 솟는 기분이 든다.
이 아이로 말하자면 개학 첫 날부터 내게 손하트를 만들어보이며 애정공세를 해준 유일한 아이였다. 내포형성도 잘 되지 않은 시기라 갑작스런 제스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나의 뜨듯미지근한 반응에도 손하트를 끊임없이 내어보이며 애정을 표시한 아이였다. 2학기에 들어선 사춘기가 왔는 지 손하트는 물러가고 일기를 통해 끊임없이 애정을 표해준다. 천성이 무뚝뚝한 내게 이 아이의 애정공세는 참 새롭게 다가왔다. 처음엔 어색했던 그 표현들이 시간이 흐르며 가랑비에 옷젖듯 자연스레 내게 스몄고 이제는 그 표현이 단순히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 나를 향해 보이는 애정이라는 것을 가슴 뜨겁게 인식하는 중이다.
작년에 맡은 아이들은 유독 표현을 잘하는 아이들이라 애정공세와 감사표현을 차고 넘치게 받았었다. 그땐 몰랐다. 그게 정말 감사한 일이고 내가 복받은 일이었다는 것을. 올해 만난 아이들은 유독 수줍음이 많은 아이들이 많아서인지 표현 자체를 어색해하는 친구들이 많다.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아이들이 많아 자주 힘이 빠지곤 하니까.
열정을 가지고 기대에 찬 채 이런 저런 수업을 기획하고 아이들과 하는 편인데 이 아이들은 도통 반응이 없다. 표현도 잘 하지 않아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때가 많고 가끔은 놓고 싶기도 하다. 나의 지도나 수업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아이들인데 그런 피드백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니 힘이 빠지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렇게 반에서 유일하게나마 나를 향해 지지를 보내고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는 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벌떡 일으켜낸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우연히 본 인상 깊은 구절이 하나 떠오른다. "아이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단 한 사람의 어른이 있다면 훌륭하게 성장한다" 그 구절을 나는 이렇게 인식했다.
"교사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단 한 사람의 아이가 있다면 힘을 내어 수업한다"
오늘따라 눈물나게 고마웠다. 6교시를 겨우 버텨낸 내게 아이의 일기장 속 응원의 메세지는 내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하루 종일 축 쳐져있던 어깨를 잠시 쭉 올리고, 창문을 열어 한기가득 상쾌한 초겨울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신다. 그리고 요 며칠 조금 소홀했던 명언을 고심해서 적어내고 하루종일 열을 내며 돌아가던 컴퓨터 스위치를 끈다.
퇴근길에 오르며 작게 마음으로 되뇐다. 어떤 상황이 와도 나를 응원해주는 한 아이의 존재로 나는 또 내일을 열심히 살아내야지. 그리고 다짐한다. 나도 학기가 끝나는 날까지 그 아이의 응원에 부응하는 단 한사람이 되어주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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