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향한 다정한 위로
가끔 수업시간에 아이들의 발표를 듣고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위안을 받는 순간을 맞닥뜨리곤 한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내게 필요한 말을 아이에게 선물처럼 받은 그런 날.
우리 반은 일주일에 두 번 세줄쓰기를 하며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곤 하는데 어제 내가 아이들에게 내어준 주제는 바로 스트레스 일기 써보기. 사실 이 주제는 아이들보다 요즘 이런저런 건강이슈와 뜻대로 안되는 일에 스트레스가 한 가득 쌓인 나를 위한 주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나도 스트레스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오늘은 선생님도 같이 동참할거라고 했더니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여느 때보다 더 열심히 열심히 연필을 굴리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열심히 검정색 펜을 들어 업무일지 노트에 꾹꾹 눌러써본다.
나의 스트레스 일기
요즘 나는 내 건강이 걱정된다. 몇 달 전 건강검진에서 좋지 못한 소견을 받고 수술을 앞두고 있는 데 너무 긴장된다. 의사선생님은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또 혹시 모르는 거니까. 무서운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내 머릿속을 뒤덮는다. 어제 아빠와 통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좋지 않으시다. 어디 아프신가? 아빠에게 목소리에 왜 힘이 없냐고 물으니 별일 아니라고 말하는 데 내가 걱정할까 그러신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의 건강과 더불어 연로하신 엄마아빠의 건강도 늘 걱정이다. 요즘 이런 잔걱정들로 인해 악몽을 꾸기도 하고 자주 불안에 떨기도 하는 중이다.
내가 펜을 놓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서 연필을 내려놓는 딱딱 소리가 교실에 미미하게 퍼져나간다. 시간은 이미 아침활동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오늘은 수업을 잠시 제쳐두고 아이들의 발표를 꼭 듣고 싶었다. 아이들의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스트레스는 뭘까? 이 자리에서 속 시원히 풀어놓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발표를 재촉했다. 수줍음이 유독 많은 올해 우리 반 아이들, 서로 눈치를 보다 맨 앞 줄 한 아이가 조심스레 손을 든다.
" 나의 스트레스는 학원 숙제이다. 쉴틈없이 학교 학원을 다녀와 잠시라도 놀고 싶은데 나를 무겁게 만드는 학원 수학숙제. 늘 그 생각만 하면 학교에서도 한숨이 푹푹 나온다."
단원평가를 볼 때 마다 100점을 척척 맞는 00이의 발표에 주변 아이들이 웅성거린다. 그러면서 묘한 위안을 받은 표정이 된다. 아 저렇게 완벽한 아이도 숙제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구나. 라고 말하는 듯 아이들은 다함께 애잔한 눈빛이 된다.
다음 발표는 두 번째 줄 맨 앞에 앉은 단발머리의 남자아이.
"나의 스트레스는 내가 화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이나 친구들한테 무시당하거나 속상해도 기분나쁘다는 표시를 못하고 속으로 꾹 참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많다"
늘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반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00이의 뜻밖의 발표에 아이들은 잠시 아연한다. 그러면서 혹시 자신이 실수한 일이 없나 골똘히 생각해보는 표정의 몇 아이들이 눈에 띈다. 그 모습에 잠시 뭉근해진다.
나도 어린시절 화를 속으로만 쌓아두던 성격이었기에 그 아이의 스트레스를 마음깊이 이해했다. 누구보다 애잔한 마음으로 아이를 향해 말한다.
"상대방으로 인해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참지 말고 조금이라도 네 감정을 표현해보려고 노력해보자. ~때문에 속상해. ~래서 기분이 좋지 않아. 라고 말이야. 마음이 여리고 착한 00이라 쉽지 않겠지만 오늘부터 조금씩 연습해보기. 이것이 널 지키는 일이니까"
내 말에 발표를 하며 굳어져있던 아이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아이들의 발표를 죽 들으며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반 아이들이나 누군가에겐 이런 조언이 입에서 술술 나오는 데 왜 내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그렇지 못할까? 아이들의 발표를 들으며 내 안의 스트레스를 반추해보다 한 여자아이의 발표에 나는 잠시 얼어버렸다.
"나의 스트레스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다. 홍콩 아파트 불이 난 사건을 보고 집에 불이 나면 어떻하지? 엄마아빠가 일찍 돌아가시면 어떻하지?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서 죽으면 어떻하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너무 많은 걱정을 한다. 생각을 안하려하는 데 늘 불안하고 공포스럽다."
내용은 다르지만 나와 꼭 닮은 스트레스였다. 실체없는 불안은 열 한살 아이나 서른을 훌쩍 넘긴 성인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거대한 무언가였다. 발표를 한 뒤 두려운 눈망울을 내게 보인 아이에게 한동안 같은 마음을 느끼며 애잔한 시선을 주다 반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이럴 땐 어떤 조언을 해줄수 있을까?
나도 함께 조언을 구하는 심장으로 애절한 마음을 담아 질문했더니 반 아이들은 부지런히 눈알을 굴리며 답변을 찾는다. 적막감이 맴돌던 교실에 한 아이의 나직한 한 마디가 그 적막을 조용히 깨고 내 귀를 부드럽게 타고 들어온다.
"여태까지 별일없었으니 앞으로도 별일 없을거야"
그 한마디에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지금 상황에 너무도 적확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나와 그 여자아이는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이의 진심어린 조언에 위안을 받았다. 아이 입장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낸 그 한 마디. 요 며칠 어떤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작지만 큰 위로의 한 마디였다. 늘 아이들에게 위안을 해주던 내가 반대로 아이를 통해 위안을 받는 귀한 순간이었다.
어제는 그 한 마디를 소중히 가슴에 품고 퇴근길에 오르며 계속해서 내 스스로에게 들려주었다. 실체없는 걱정과 불안에 자꾸 나를 괴롭게 하지 말고 아이가 내어준 소중한 한 마디를 각인하며 앞으로 내게 닥쳐올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긍정적으로 풀어나가자고.
수업시간에 우연히 만난 한 아이의 다정한 한 마디. 가끔은 책보다 티끌없이 맑은 아이들의 생각에서 이토록 귀한 명문장을 만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어제였다.
올해 11월까지 별일없이 잘 지나갔으니 남은 한달도 별일없이 잘 지나가리라.
내게 꼭 필요했던 말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미리 당겨받은 듯한 어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