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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콕 Oct 26. 2024

차분하게 담배 피우기

긴 산책과 데메테르 코튼블루향을 즐기던 후배

대학원 후배 오징, 씅, 해리와 송년회를 했다. 구운 차돌박이 몇 점 만이 불판 위에 남아있고, 후식으로 비빔 국수와 볶음밥을 시킨 참이었다. 그 때 씅이 말했다.

 “이자카야로 2차를 가고 싶은데, 담배 피러 나갈 때 예약 전화할 게요.”

 “어 이제 담배도 피워?”

 또 술을 마시러 가는 것에 반대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도 씅이 담배를 핀다는 데서 놀라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후배가 주옥 같은 직장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방법을 모색했구나, 지레짐작했다.


 “원래 피웠어요.”

 씅은 코트 주머니와 손가방을 뒤적였다. 옛날에 곤지하고 피우러 다녔는데, 하고 덧붙였다. 곤지는 망년회에 나오지 않은 씅의 동기다.

 “와! 전혀 몰랐었는데!”

 같이 있는 동안 둘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봤다 거나, 냄새를 맡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외였다. 씅은 웃으며 “선배 완전 눈새구나.” 하고 놀렸다.

 “난 그냥 둘이 산책을 오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점심 시간만 지나면 둘이 마실 것을 들고 산책 가겠다고 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기억을 더듬다가 이마를 탁, 쳤다.

 “데메테르 코튼향! 그거 엄청 뿌리고 다녔지.”

 그리고 곤지는 바디 판타지에서 나온 미스트를 늘 가지고 다녔다. 그 땐 그 둘이 대학원에서 보기 드문 멋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둘이 흡연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있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8년만에 알게 된 스스로의 무신경함에 감탄을 했다.

 “나는 옛날부터 선배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 없는 점이 좋더라.”


 씅은 보수적인 학풍(?) 속에서 담배를 피우기가 험난했다고 말했다. 남학생들은 자대 건물 앞에 있는 나무 그늘 밑에서 대놓고 끽연할 수 있었지만, 둘은 아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단과대나 도서관 뒤로 원정을 가야 했다고. 그러다가 될 대로 되라 자대에서 피웠더니 여학생이 담배를? 파들 파들 거리며 담당교수에게 일러바치는 교수가 있었다고 했다.

 “언제는 교수님이 ‘나도 옛날에 담배를 피웠는데 손이 떨려서 끊었어.’ 하시더라고요. 담배 피는 거 보고 다른 교수가 이른 거죠.”

 “고등학교 학주한테 이르는 것도 아니고 뭐야. 막말로, 다른 연구실 남자 선배들은 교수 퇴근하고 나면 연구실에서 담배 뻑뻑 피우던데 어처구니가 없네.”

 가연성 물질로 가득 찬 방에서 담배 피던 선배들을 언급하자 씅의 얼굴이 굳었다.

 “아, 그 선배들.”

 씅과 곤지가 담배 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 선배 중 하나는 담배 피러 나가는 둘이 창밖으로 보이면 창문을 열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고 했다.

 “장난으로 했겠 지만 존나 기분이 더럽더라고요. 또 다른 선배 하나는 같이 담배 피우고 싶어서 환장을 하고.”

 “장난이고 자시고, 그거 히야까시 아니야? 성희롱이지 성희롱. 미쳤네.”

평소 아무데나 매연, 가래, 침, 꽁초로 거리를 더럽히고 화기가 금지된 곳에서 지각없이 불을 댕기는 흡연자를 혐오했다. 하지만 씅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겪은 고초를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고작 고간에 살덩이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흡연 열사라도 된 양 길길이 날뛰자 씅은 자신이 겪은 일에 공감하고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건 고마워할 일이 아니야 당연한 말이야! 하고 소리쳤지만, 부끄러웠다. 8년 전에 씅과 곤지가 담배 피는 걸 알았어도 그 둘을 선입견 없이 대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색안경을 벗기 전에 후배가 흡연자라는 걸 몰랐던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가 담배는 좀.’ 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가진 채로 씅이 흡연자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훌륭한 후배와 계속 교제할 기회를 잃었을 테니까.


 씅은 학교에서 겪었던 일로 직장에서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사 동료들은 본인이 흡연자인지 모른다고 했다. 흡연은 건강을 위해 안 는 것이 가장 좋지만, 성인이 되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커피, 알코올 온갖 기호품에 기대지 않던가. 좋아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하지 못한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씅 때문에 요즘 애들은 자대 앞에서 남자 애들이랑 맞담배 피워요.”

 최근까지 학교에 있었던 오징이 말했다. 그걸 요즘 학생들이 시작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봐야 할

지, 걔들의 선배인 씅으로부터 비롯된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씅이 마음 놓고

내키는 순간에 담배를 즐기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언젠가 씅이 불안감 없이, 차분하게 담배를 피우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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