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모르는 사차원 장난감
장난감 가지고 놀 나이는 옛날 간 날에 지나갔지만, 가끔씩 생각나는 장난감이 있다. 코카콜라 요요와 노란색 안전 장도리다. 그런데 자주 가지고 놀 던 장난감은 아니었다. 가지고 논 시간 보다 상자에 처박혀 있던 나날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가지고 놀았던 단 몇 분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잠깐 구미에서 살던 때였다. 집 앞에 작은 개척교회가 있었는데 엄마는 동네 큰 교회를 두고 집 앞에 그 교회에 다녔다. 엄마는 낯선 곳으로 이사를 온 탓에 교인 확보 차원에서 살갑게 구는 개척 교회 목사 사모님을 마다하지 않았다. 집 바로 코앞에 교회가 있어서 사택에도 자주 갔다. 거기에 딸려가면 뭐, 재미라고 할 게 없었다. 어른들끼리 대화하는 동안 사택 안을 배회하면서 없는 재미를 찾아보려 했던 것 같다.
사실, 요요와 노란 장도리가 애초에 내 물건이었는지 부터가 의문이긴 하다. 기억나는 장면은 이것이다. 나는 목사 아들 중 한 명에게 코카콜라 요요를 내밀고 “치치, 도와줘!” 라고 외친다. 치치라 불린 목사 아들은 노란 망치로 요요의 한복판을 딱 내려친다. 그게 놀이의 전부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어쩐지 요요와 노란 장도리는 우리집 장난감 상자에 있었다.
합리적인 추론이라면, 내가 사택에서 호작질을 하다가 요요랑 노란 장도리를 발견하고 목사아들을 끌어들여 ‘이상한 나라의 폴’ 놀이를 했고 집에 돌아갈 때 까지 장난감을 쥐고 돌려주질 않으니 줘버렸다……라는 흐름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어찌된 경위로 내 장난감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그 이후로는 그것들을 제대로 가지고 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엄마나 아빠에게 치치 도와줘! 라고 해봤자 딱부리니 요술봉이니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치치 없는 딱부리는 실에 매달려 힘 없이 흔들리고 두들겨 팰 딱부리 없는 요술봉은 벽에 박혀 있지도 않은 못을 치는 시늉이나 하는데 쓰였다. 그리고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게 되었을 때 딱부리와 오컬트 망치는 영영 사라졌다. 사차원 세계로 가버린 거지.
어느 날 엄마에게 그런 장난감이 있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는 최근에 연락이 끊어졌던 목사 사모님과 연락이 닿아서 원한다면 장난감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다고 했다. 목사님은 암으로 돌아가셨고, 목사 아들 중 하나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목사가 되었고, 교회에서 반주하던 집사는 바람이 나서 가출을 했고…….
나는 질색을 하며 엄마의 제안을 거절했다. 추억의 장난감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야 깔끔할 것 같다. 코카콜라 요요와 오컬트 장도리는 그런 홍진과 어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