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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콕 Oct 26. 2024

팬 픽션 읽는 밤

오닥쿠는 성탄절에 이렇게 논다

*주의*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다루는 픽션에 대한 간접 인용이 있음


 패밀리 레스토랑 벽면 가득 크리스마스 리스와 가랜드가 걸려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머라이어 캐리의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나와 친구는 애인과의 데이트도, 가족 모임 계획도 없어서 서로를 만났다.

 해가 지나면 일에 능숙해질 줄 알았는데 갈수록 일이 힘들어진다. 월급이 오르면 무엇 하나 건강 보험료가 국민 연금이 공과금이 더 올라서 살기가 팍팍하다. 우는 소리를 하다 문득 “지금 너무 어른 같았다. 전 지구적 명절이니 심각한 얘기를 말고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를 하자.”는 말이 나왔다. 어른 노릇은 평소로 족했다.

 와!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 를 제안했지만 잠깐 정적이 흘렀다. 눈 앞에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뒤적이다 “전에 얘기한 적 있는데. 요즘 내가 드라마를 보고 있거든.” 하고 입을 뗐다. 친구는 휴대폰 시계를 보더니 “심도 있는 얘긴 자취방 가서 하자.” 고 현명한 답을 내놓았다.


 코트와 목도리와 가방을 허물처럼 벗어서 바닥에 내려놨다. 친구가 새로 샀다는 건빵 모양 원목 수납장 이야기를 하다가 본론에 돌입했다. 친구는 소파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 앉아 드라마 설명 중간중간 휴대폰으로 스틸 컷을 보여주었다. 친구는 철저하게 점수를 매겼다.

저변에 깔린 백인 구원서사 -1점

근래에 보기 드문 로맨틱 코미디 +5점

주연 배우 수염 -10점

합계 -6점으로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했다. 영업 실패였다.

 그러나 아직 한가지 패가 남아 있었다. 시각적 취향을 타지 않고, 순수하게 서사로 승부하는 엄선된 팬 픽션이 그것이었다.


 “보여준 얼굴은 다 잊어버리고 이걸 좀 들어 봐라.”

 A와 B는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는 룸메이트 관계이고 A는 B를 싫어하지만 B가 데리고 오는 C를 좋아하기 때문에 B와 계속 같은 방을 쓰고 있어. 그런데 B와 C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재미보는 친구 관계야. B는 A가 C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A를 다자연애관계로 끌어들이지.

 “도대체 요즘 뭘 읽는 거니!” 친구는 폴리 아모리가 나온다는 말에 비명을 질렀지만, 계속 해보라며 재촉했다.

 다자 연애 관계에서 A는 C에게 헌신적이었지만, C는 곧 ‘진정한 사랑’을 만나 A와 B를 떠났어. B는 친구를 잃어 섭섭한 정도였지만, A는 C를 잃고 실의에 빠지지. 그런데 A가 몰랐던 사실이 있었어. B가 A를 C와 같은 재미보는 친구로 봤던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거였지.

 “그러니까 이 글의 포인트는 얼핏 난잡한 관계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B의 온리 원이 A라는 거라.”

 “잠깐, 링크 좀. 직접 보고 판단할 게.”


 링크를 넘겨 받은 친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추천한 글이 ‘명작’이라는 사실엔 추호도 의심이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켰다. 다시 읽어도 걸작이었다.

 시계가 없는 방에선 무브먼트가 똑딱 이는 소리 대신에 냉장고 콤프레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이토록 숨죽여 목두하고 있다니. 교지 편집부 컴퓨터로 야자 시간에 몰래 친구와 웹툰을 보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한참 글을 읽던 친구가 잠시 폰을 내려 두고 한숨을 쉬었다. 한 박자 쉬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꿀꺽, 군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와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대목인지 짐작이 갔다.


 A는 B와의 내밀한 접촉을 통해 C를 잃은 상실감을 잊으려고 한다. B는 A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만, A에게 있어서 자신은 C 다음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A를 밀어낸다.

 ‘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서 내게 안주하려는 거야.’

 ‘그건 아니야.’

 ‘A, 난 언제나 너의 백업 계획이었어.’

 ‘B, 내가 그냥 이걸 즐기게 두면 안 돼?’

 A는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고, A가 잠깐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B는 거절하지 못한다.


그 장면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소설 전체에서 그 부분이 압권이었거든.

“야, 어디 읽고 있는데.”

“닥쳐봐.”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가 주먹을 쥔 손으로 소파를 퍽퍽 내려쳤다. 그러다가 휴대폰을 내려 두고 양손으로 얼굴을 세차게 문질렀다. 내가 이미 거쳐온 행동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신기했다. 친구는 픽션을 다 읽은 것이 분명했지만, 입술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와.” 감탄을 터뜨리고 이어, “쩐다.” 고 말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그냥 이걸 즐기게 두면 안 돼?” 동시에 외쳤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랑을 알아 보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 보는 삼각관계의 저릿함과 청바지를 통해 느껴지는 단단하고 따뜻한 무릎의 감각적 묘사에 대해 침을 튀기며 떠들어댔다.

너무 많은 말을 해 마른 혀가 입 천장에 눌러 붙고 눈이 너무 건조해져서 뜰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냉정한 눈으로 보자면, 성탄전야에 솔로 두 명이 방구석에서 팬 픽션을 읽고 있는 한심한 모습이다. 그래서 친구 자취방에서 누워 있는 동안 비참하고 불행했느냐고 자문해본다면 재밌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한 밤을 보내는 행복도 있겠지만 나의 기호를 손가락질하지 않을 사람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하는 행복도 있다고 하고 싶다.

 팬 픽션, 그건 사춘기 때 졸업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글쎄, 노스텔지어는 괴짜를 위한 것이라는 이론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냥 읽고 싶어 한다.¹ 그것이 오타쿠의 행복이다.

 좋은 작품, 좋은 작품을 아름답게 변주하는 재능 있는 작가들, 작품에 대해 떠들어댈 친구. 작품을 감상할 방구석. 그것이면 족하다.



[1] I’ve overheard your theory “Nostalgia’s for geeks” I guess sir, if you say so Some of us just like to read (Applause, Lady g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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