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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콕 Oct 26. 2024

내 귓속의 무대

출퇴근길 플레이리스트

퇴근해서 저녁을 긁어 먹고 잠깐, 휴대폰을 볼 셈이었다. 눈이 뻑뻑해서 시간을 봤더니 벌써, 아홉시 였다. 베개에 기댄 채로 세 걸음 거리의 싱크대를 보니 가슴이 갑갑했다. 설거지는 언제 해치우고 또 씻고 자냐. 이럴 때는 도핑이 필요하다.

 하와이 파이브 오 인트로¹를 찾아 재생 버튼을 누른다. 다급한 드럼 전주에 맞춰 트럼펫 소리가 터지 기 전에 싱크대로 튀어나갔다. 수세미에 세제를 짜면 초읽기가 시작된다. BGM을 켠 순간 연주가 멎기 전에 설거지를 해치워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적고 보니 고작 일 인분 설거지를 해치우는 데 염병 을 떤다 싶다.

 세계는 무대고 나는 주인공은 아니다만, 가끔은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 고작 먹 을 그릇을 닦고 젖은 빨래를 너는 순간일 지라도. 그래서 내 음악 재생 목록에는 드라마, 영화, 뮤지컬 에 삽입된 배경 음악이나 넘버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플레이 리스트는 우중충한 일상을 화려하게 채색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로 같은 출근 길을 팔 년 째 걸어서 왕복하고 있다. 거짓말 보태서, 눈꺼풀이 지나치게 무겁거나 일광 이 강한 날엔 눈을 감고 다닐 수 있을 정도다. 난 밤과 결혼한 것도 아닌데 그냥 이 길엔 더 이상 탐 구할 건덕지가 없다.² 무감하게 출근하다가 앗 씨발 내가 푼돈을 벌자고 오사장네 종살이를 하러 가고 있구나 서글픈 자각이 들 때가 있다. 귓속으로 무대를 불러와야 한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내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나와는 다르게, 무대 위의 주인공들은 도전적이고 욕망에 솔직하다. 자신의 심정을 과감한 언어로 노래한다.

 나 이제 당신들의 교회에서 내 이름을 지울 테니 보라 ³

 돈으로 극형을 면하고 인형 같은 주부로 돌아 가느니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어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해적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앤 보니가 등장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땅을 거부한다

 느그들이 지지하는 자본주의자, 사회주의자, 파시스트, 우파, 좌파 모두 맛탱이가 간 도둑놈들이니 다 가오는 선거에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에 표를 던지라고 부르짖는 부두 펑크의 사제도 있다.

 더 이상 탐험할 것이 없는 인도에 장점이 있다면, 출근하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다. 흥을 주체 못해 노래를 좀 따라 불러도 면구할 일이 없다.


 잘 봐, 내가 별을 쏜다 별이 부서지면 나는 바다로 간다.


 평소의 나라면 기껏해야 친한 직원 두어 명 정도에게 편의점 커피를 쏘겠다는 말이나 할 수 있을 것 이다. 노래를 구실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서 너 곡쯤 재생하고 나면 회사 신발장 앞에 도착해 있다. 임박한 새로운 국면을 대비해 방정식을 재 점검 해야한다.⁷ 업무 중에 음악 듣는 걸 곱게 보는 상사는 드물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해적과 매장 지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부두 펑크와 작별해야 한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환한 무대 조명이 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다. 나는 그냥 회사가 입혀주고 먹여주는 사축이다. 

머리와 염통으로 콸콸 솟구치던 피가 발 아래로 수욱 가라앉았다. 갑작스러운 혈류 변화는 건강에 좋 지가 않다. 이래서 누군가는 오래 살고 싶다면 노래를 그쳐야 한다고 했나 보다.

 플레이 리스트 재생 전 후 기분 낙차가 이렇게 크다. 그렇다고 해서 텅 빈 무대를 바라보며 객석에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서진 조각을 모아 집으로¹아니, 실내화를 신고 사무실로 돌아 가야지.

 사무실에 올라가면 인사는 안녕하십니까 다. 서로의 상태를 물을 뿐, 빈말로도 좋은 아침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다들 죽상을 하고 책상 위에 귀에서 떨어져 나간 콩나물 대가리, 강낭콩, 똘추 청진기 하나씩 올려 두고 있다. 다들 플레이 리스트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님)

 근무 시작 전에 후유증을 이겨내는 모습도 각양 각색이다. 담배를 피러 우르르 아래로 내려가는 사

람들이 있고, 넋 나간 표정으로 믹스 커피를 휘젓는 사람이 있고, 어깨와 팔을 꿈틀거리면서 요상한 율동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물어보니 기운을 끌어 올리는 춤이란다.

 내게도 음악 재생기 없이 근로의욕을 끌어 올리는 방법이 있다. 노래 듣는 건 막을 수 있어도 부르

는 건 막을 수 없지.¹¹ 일하는 동안은 희미한 기억력에 의존해, 출퇴근 길에 갈고 닦은 목소리¹²로 플레 이 리스트의 노래를 허밍 하면 된다.  

 플레이 리스트를 주구장창 듣고 따라 부른다고 해서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진 않을 것이다. 하지

만 내 귀에 잠깐 머물다가 오랜 시간 내 머릿속의 무대로 남아 잠시간 시름으로부터 달아나게 해준다. 힘든 순간에 무대로 나를 부르는 플레이리스트를 사랑한다.  



[1] 빰빰빰빰빰


[2] 나는 이 밤과 결혼 할거야, 이 거리에 더는 탐험할 것을 남겨두지 않을 거야 (Marry the night)


[3] 질투하라 (뮤지컬 해적)


[4] The movement I (The dolls of New Albion : A Steampunk Opera)


[5] 스텔라 마리스 (뮤지컬 해적)


[6] Edgar Builds a Business (The dolls of New Albion : A Steampunk Opera)


[7] Annabel Raises the Dead (The dolls of New Albion : A Steampunk Opera)


[8] 네가 입히고 먹였던 절름발이는 굶주리지도, 춥지도 않았어 (Avalanche)


[9] 오래 살고 싶다면, 노래를 부르지 마세요 (You’re Dead)


[10] Gold Dust Woman


[11] 내 몸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내 목소리는 멈출 수 없어 (Do What U want)


[12] 시의 단어를 빌려, 성가대의 목소리로 (Edge of Seven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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