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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콕 Oct 26. 2024

나란 기계

덜그덕 덜그덕

매일 출근하는 일터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기계들의 호스피스라고 하겠다. 이 십년 전에 자산으로 잡힌 펌프와 순환기가 검은 가루를 떨어뜨리고 털털 몸을 떤다. 언제 모터가 멎고 메인기판이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운전을 하루하루 지속 중이었다.

 어느 날 터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펌프가 뚝, 멈췄다. 펌프를 해체한 수리 기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남은 부품도 없어서 수리를 못해주겠다고 했다. 새로 기계를 사려면 견적 받고 기안 쓰고 결재를 받고 염병을 하고 한 달은 걸릴 텐데 고장 나기 전에 새 펌프로 뚝딱, 바꿨으면 얼마나 좋았겠는 가. 펌프가 없는 동안 어떻게 일을 하라고?

윗 대가리들은 기계 사는 돈만 돈으로 생각하지 시간 귀한줄을 모른다. 폐기 딱지가 붙은 펌프를 폐기장에 거칠게 내려 놨다. 화를 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했나요? 분노를 감당할 준비가 안되어 있던 왼손 약지가 기계에 빗맞아 뒤로 홱 제쳐졌다.

동네 정형외과 의사는 뢴트겐을 찍어보자고 했다. 방사선사가 손 포즈를 이렇게, 저렇게 잡아보라고 손가락을 꺾었다. 시키는 대로 어렵지 않게 손가락을 굽힐 수 있는 걸 보면 인대가 좀 늘어난 것이겠지, 자가진단을 내렸다. 의사는 손뼈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인대 늘어난 거겠죠?”

빨리 파스나 처방받고 집에 가고 싶었다. 의사가 입을 떼기도 전에 불쑥, 말했다. 아픈 부위를 맴돌던 커서가 멈췄다. 의사 마우스를 내려 놓고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여어기 분균질한 면이 보이시지? 골종양이 좀 의심스러운데?”

종양이라 함은 튜머, 캔써, 암, 어떠한 선고와 같은 말이 아니던가. 의자에 붙이고 있던 궁둥이가 허공으로 들썩였다.

“골종양이요? 갑자기요?”

“암, 이라는게 아니고오. 한 달 후에 한 번 더 사진을 찍어 보자구요.”

의사는 종양, 튜머, 어떠한 선고를 때린 것 치곤 태연하게 환자를 돌려보냈다. 심지어 파스도 안 줬다. 이건 의사의 진단을 가로챈 보복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쫌생이 같은 인간.’

욱신거리는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받치고 몇 번의 오타 끝에 골종양을 검색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것이나 마찬 가지였다. 어떻게 이런 심각한 병을 한 달 후에나 확인하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찔찔대며 다른 병원에 갔다.

"로컬에서 튜머가 의심된다고 온 환자인데..."

의사는 새로 찍은 엑스레이를 두고 영상의학과와 통화했다.

미드 팔랑스에 까만 부분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내 손가락엔 악성 신생물이 없다는 거였다. 초진비에 영상촬영비에 정형외과와 영상의학의 협진으로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낸 것이다.

그러나 종양 소동은 새가슴에 상당한 상해를 남겼다. 사소한 통증에도 겁을 집어먹고 병명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관자놀이가 깨질듯이 쑤시면 측두동맥염, 눈 앞이 부옇게 흐려서 안 보이면 아벨리노 각막 이상증이라는 식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 는 타이레놀을 먹거나 인공누액 좀 넣으면 잠재울 수 있는 증세였다. 문제는 홈레머디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었다.

언젠가 부터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 엉덩이가 불타는 것 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편해야 할 누운 자세에서도 엉덩이가 바닥에 닿으면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각종 의학 기사와 블로그, 지식인은 이런 증상을 좌골신경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 아프다, 넌 궁디에 살이 없으니 더 그렇지 않겠느냐, 방석을 써봐라 제법 합리적인 충고를 받았다. 하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좌골신경통 또는 보다 쿨한(?) 이름의 병에 걸린 게 틀림 없었다. 달달떨며 병원 대기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의사는 '그럴 나이가 됐다.'고 말했다. 의학적으로 노화가 시작되고 있다고 땅땅 선고를 내렸다. 완충이 안되고 윤활 기능이 떨어지고 탄성을 잃고 마찰되어 마모가 된 마디, 관절, 부품.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야기 였다. 그러니까 기계의 호스피스에서 가장 낡은 건 폐기한 펌프가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30년 넘게 쓰는 가전은 없다.

 기계는 만들어진 목적대로 실컷 작동하다가 운명을 다 하는 반면, 나란 기계는 삼 십 여년을 넘게 용도 불명으로 마구잡이로 쓰이다가 덜컥, 품질보증 연한이 끝나버린 것이다. 이렇게 억울할 데가. 이 놈의 몸뚱아리 확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마냥 청춘인 줄 알았는데.' 라는 소리를 내가 하게 될 줄을 몰랐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젊은 마음으로 늘 청년처럼 살아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정신도 신체의 작용에 종속되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방석을 샀다. 이 놈의 기계, 아껴써야지. 노화가 시작되고 했지 늙었다고는 안했다. 하드웨어는 덜컥 거릴지언정,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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