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몇 년 전부터 단골 옷가게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한다. 옷 파는 곳이 사방천지에 널려 있는데도 말이다. 주택가 골목골목 옷가게가 있고, 번화가에 나가면 백화점, 아울렛. 티브이 틀면 지금, 전화 주세요! 홈쇼핑 광고에 인터넷은 말할 필요가 없다. 가판대에 널린 옷을 만지작 거리면서, 휴대폰 스크롤을 슬슬 내리며 "이 옷 어떨까?" 물어보면서도, 지갑을 열지 않는다. 세상에 옷이 천지삐까리인데, 내 옷이다 싶은 옷이 없는 모양이다.
단골 가게인 54호는 교동 시장 숙녀복 밀집 상가 건물 54호에 있던 양품점이다. 엄마가 54호에 드나드는 시간 동안 나는 숙녀가 아니었던 고로, 거기서 옷을 산 적은 없다. 엄마가 외출할 때, 혼자 집 지키고 있으면 위험하니까 딸려 간 거지. 54호에 끌려가면 한두 시간은 기본으로 잡혀 있다고 보면 된다. 옷 입는 손님이나, 옷 파는 가게 주인에게는 황홀한 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취학 아동에게는 심심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어쩌다 외할머니도 옷 쇼핑에 가세하면, 말해 뭐 해? 옷을 사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옷더미에 기대 졸았던 기억이 난다.
‘지루했다’는 옷 살 일 없는 어린이의 감상이고, 나이를 먹고 나서 54호에서의 경험을 곱씹어 보면 사장의 장사 수완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어린애가 딸린 손님이 왔다? 새침한 인상의 점주는 손님이 아니라, 어린애부터 공략한다.
“아이구, 몽콕이 왔구나. 뭐 줄까?”
“얘한테 뭐 안 주셔도 돼요.” 극구 사양해 봐야, 이미 전화 수화기를 들고 상가 윗층에 있는 다방에 주문을 마친 뒤다. 잠시 후, 설탕을 팍팍 친 토마토 생과일주스가 배달된다. 공짜 음료수까지 얻어 마시고 옷 한 벌 안 사갈 철면피는 있을 수가 없다.
“오늘은 뭘 좀 보여드릴까?”
어린애를 인질로 잡고 나면, 본격적으로 손님은 공략하는 것이다.
“계절도 바뀌었는데 입을 게 마땅찮 네요.” 손님의 두루뭉술한 요구에는 그저 물량 공세다. 진열장 여기에서부터 저기까지 걸려 있는 옷을 차례로 내 온다.
“이건 색깔이 조금 별로네. 이걸 입어 볼래요?”
“그건 몽콕 엄마한테 완전 딱이다!”
“바지 허리가 헐렁하다고? 내가 얼른 수선 맡기고 올게.”
“그 블라우스엔 이 자켓이지.”
손님이 지칠 때까지 가게에 걸린 옷을 갈아입힌다. 매장에 있는 옷을 다 입어 보고 나면, 마음에 드는 옷이 네댓 벌은 나오기 마련이다.
“아, 다 마음에 드는데. 이 블라우스랑, 그 재킷, 바지 살게요.” 바지가 수선 가게에서 돌아오는 동안에 몇 벌이 더해지기도 한다.
“여기 마이에 달린 브로치는 DP 인가요?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우리 사이에 서비스로 주지.”
작은 장식도 사은품으로 준다.
“그럼 다 해서 가격이…… 하지만 우리 사이니까 에누리를 좀 해서……. 이 정도 나오네요.”
현란한 손짓으로 전자계산기를 두드린다. 애초에 정가보다 높게 가격을 불렀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지만, 합계에 몇 % 누르는 점주의 손놀림에 손님은 앞으로 영원히 호구 잡힐 결심을 하게 된다. 다음에도 여기서 옷 사야지, 하고.
저런 서비스를 받다가 ‘다른 물건 좀 보여주세요.’ 부탁하기 조차 눈치 보이는 옷가게에 가면, 옷 살 맛이 안 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장이 나이가 들어 폐점을 한 이후로는, 엄마는 옷을 잘 사지 않는다. 옷장에 남아있는 54호 코트, 재킷, 원피스, 셔츠를 아껴가며 입는다.
퇴근해서 집에 왔더니 엄마가 “이 셔츠 좀 입어 봐라.” 하고 서랍을 열었다. 주황색 바탕에 페이즐리 무늬가 있는 코듀로이 셔츠였다. “그 할매 같은 옷은 뭔데.” 인상을 쓰면서 받았는데, 입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거 은근 마음에 드는데. 입고 다녀야겠다. 이런 이상한 옷은 어디서 났는데?”
“54호 폐점할 때, 가게 사장이 할머니한테 줬다더라.”
이 쯤되면, 코듀로이 남방은 단골 일가에게 남기는 54호 사장의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3대에 걸쳐 가족이 54호 취향이 될 걸 예상했던 거지.
페이즐리 패턴 셔츠 입고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잡으며 54호의 손님인 나를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