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선 졸업 요건을 채우면 졸업을 시켜준다. 일터는 정리 해고, 구조조정, 부당 해고, 도산, 파산 등의 사유가 아니라면 그만두는 건 내 의지에 달려 있다. 매일 똑같은 출근길이 지겨워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급식이 맛대가리가 없어서, 회사를 벗어나고 싶은 이유라면 끝도 없이 댈 수 있다.
자소서며 이력서를 다시 쓰는 상상만으로 끔찍스럽고 여기라도 아니면 날 받아 줄 곳은 없을 것 같고 달마다 계좌로 들어오는 월급은 끊을 수가 없고 결국엔 회사란 게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중이었다.
올해 1월 2일 오전 7시 59분, 새해 첫 출근을 하기도 전에 머리 위로 망치가 떨어졌다. 동료 오드리가 신정 연휴 내내 고민한 끝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고 카톡을 보내온 것이다. 둘이 눈만 마주쳤다 하면 이 따위 회사 때려치워야지 노래노래를 불렀지만, 나간다는 사람 붙잡을 구실 하나 없지만 삼 년이나 함께 일한 동료가 떠난다고 하니 충격을 받았다.
드리는 새해에 가장 먼저 출근해서 부서장에게 사직 의사를 밝혔다. 부서장은 일주일간 두 번에 걸친 <오드리 주임 퇴사의 관한 건>을 퇴사 후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드리의 말에 반려했다.
"불만 사항이 있으면 다 개선해 줄 테니까 계속 다니 라면서 사직서를 박박 찢더라구요."
"그게, 고칠 수 있는 문제였나요?"
퇴사도 마음대로 안 시켜주는 미친 회사라며 맞장구를 치면서, 역설적으로 안심했다. 오히려 오드리의 '퇴사 미수 사건'은 드리와의 동료애를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된 듯도 싶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이대로 둘이서 오 이사 김이사가 될 때까지 버티자,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이 '퇴사 미수 사건'의 결말을 말해주고 있다. 구정이 지나고 드리는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둘은 눈이 녹아 척척한 옥상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드리는 학교 선배가 다니는 회사에 가게 됐다고 했다. 대학원에서 연구하던 주제와 유사한 과제를 새 회사에서 추진하고 있어 면접을 봤더니 "당장이라도 와달라." 재촉했다고. 드리는 맡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직 시점이 좋았다. 드리의 퇴사는 단순히 회사를 나가는 게 아니라 이 단계를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졸업. 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드리가 두 번째로 퇴사를 말했을 때는, 드리와 헤어진다는 아쉬움 보다 드리에 대한 부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자신의 의지로 다음 진로를 결정하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몇 년 동안 내 뜻대로 하던 일을 멈추고 새로운 일에 뛰어든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누군가 그만두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거기까지 해라.” 고 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리의 퇴사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대오각성을 해 이직 준비를 하고 있냐고? 이직 생각을 해보긴 했다.
‘나 이제 어떻게 해야해?’
조바심이 나 졸고 있던 졸업사정관을 두드려 깨웠더니, ‘동요하지 마라. 하던 거나 마저해라.’는 답이 돌아왔다. 초조한 마음을 다잡고 생각해 보니, 내 다음 진로는 더 나은 직장이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쓰는데 이직씩이나 필요하지는 않다. 다만, 많은 연습이 필요할 뿐. 당분간은 좋아하는 일에 손 놓지 말고, 직장생활을 버티는 수밖에 없다.
다 때려치우고 새 출발을 한다면 화끈할지는 모르겠지만, ‘졸업’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드리처럼 졸업을 하고 싶다. 퇴사를 꿈꾸는 마음은 한결같지만, 지긋지긋한 직장생활을 목적 없이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위한 긴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졸업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