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사장님이 안 좋아하셔."
부서장의 맥심이다. 업무 진척이 더딜 때 상사에게 욕먹는 건 짜증이야 나지만, 이해는 된다. 부서장도 격주마다 있는 임원 회의에서 오너에게 깨지지 않으려면 뭔가 성과가 있어야 할 테니까. 문제는, 사장 기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정당한 권리 행사와 비용지출에 까지 사장님 기분 타령을 한다는 점이다.
당일에 갑자기 연차 쓰는 거 싫어하셔. 금요일에 연차 쓰는 거 안 좋아하셔. 기계 수리한다고 하면 관리를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신다. 기기 (산 지 이 십 년도 넘어서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지는 상태) 새로 산다고 기안 넣으면 사장님 난리 난다. 몇 십 년 근무하는 동안 을매나 시달렸으면 저렇게까지 사장 눈치를 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근데, 인간적으로 부서장이 입사할 때부터 쓰던 펌프를 교체하겠다는데 사장 기분 타령은 좀 심한 거 아니냔 말이다.
"사장님한테 뭐라고 설명할래."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십 분은 넘게 들었다. 월급쟁이를 노비나 머슴에 곧 잘 비유한다지만, 거의 주인 어르신이 아끼는 청화백자를 박살 낸 종놈 취급이었다. 주머니 밖으로 잠깐 손 꺼낸 것만으로도 손가락이 곱아드는 한파에도 속에서는 천불이 났다. 심화를 진압할 얼음 음료수를 사러 회사 밖으로 나갔다.
"펌프 안 사주면 어떻게 일하라고, 빨대로 빨아들일까?"
바닥에 쌓인 눈을 걷어찼다.
"옥상에 장판 깔고 고추 말리 듯이 널면 되겠네요."
"생각을 해봤는데, 우리 회사가 마트였으면 부서장이 '사장님이 냉동창고 전원 끄고, 물건 마당에 옮기라고 하셨다. 전기 요금 아끼게.'라고 했을 것 같아요."
부서장이 다각도로 사장님 심기를 헤아리는 동안, 부서원들도 유머 감각이 늘었다. 깔깔 웃는 동안 카페에 도착했다.
“오늘은 내가 끌고 나왔으니까 내가 낼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1L, 아이스 바닐라 라테. 손에 하나씩 테이크 아웃잔을 들었다.
“잘 마실게요.”
감사 인사를 듣기가 멋쩍었다. 쑥스러움을 몰아낼 펀치라인을 날렸다.
“이거, 사장님이 사는 거야.”
부서장 흉내를 썩 잘 냈다고 생각하면서 찬 커피를 들이켰다. 기대했던 웃음은 없었다. 눈 밟는 소리와 컵 속의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내 유머 감각도 다 뒤졌구나.’
몹쓸 성대모사를 탓하며 ‘사장님이 산 커피’를 음미하다가 기분을 잡쳤다. 내 카드 긁어 산 커피인데 사장님이 산 커피는 무슨,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황급히 “김몽콕 사장이 사는 커피야. 김 사장이 사는 커피.” 덧붙였다. 그래봐야 와르르 무너진 노동자의 프라이드는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죠. 내 돈 내산 커피.”
농담을 살리려는 노력을 안타깝게 여긴 동료 오드리가 덧 붙였다. 사족이 덕지덕지 붙은 농담에 사망선고가 떨어졌다. 차고 쓴 커피를 넘기며 회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