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의 세상에서
Sobrevivir en un mundo de villanos
드리는 졸업 전에 타부서 직원인 BB와 나를 연결해 주고 갔다. BB와는 5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고 직급 차이도 있다. 굳이 공통점을 찾아 보자면 부서에 한 명 뿐인 여자라는 것, MBTI 유형이 같다는 점이다. 없는 공통점을 쥐어짜서 일종의 카카오톡 대나무 숲을 결성했다.
어느 날 BB는 메신저로 타부서에서 자신의 평판이 어떻냐고 물었다.
나 : 아무도 BB씨 얘기 하는 사람 없는데요?
BB는 부서장에게 "타 부서에서 BB씨를 안 좋게 보니, 처신 똑바로 하고 다녀요." 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BB는 회사 내 평판이 좋지 않다는 부서장의 말에 타부서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물었지만, 부서장은 구체적인 대답을 피했고,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본인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면, 본사에 있는 비둘기 과장한테 물어봐요." 하며 더 이상의 질문을 일축 했다고 한다.
BB가 자기가 잘못한 부분은 축소해 이야기 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본사의 비둘기 과장을 보고 배워라." 는 말을 했다는 점에서, 팀장이 BB를 정당한 이유 없이 비난한다는 데 무게가 실렸다.
비둘기는 지점에 있다가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정치력과 처세술로 본사로 발령난 BB의 전임자다. 콕 집어 전임자의 행동을 본받으라는 팀장의 요구는 BB에게 평균 이상의 '의전'과 '서비스 정신'을 상사에게 발휘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나 : 팀장이 비둘기 과장이 본사 가서 서운한가 보네요
적극적인 자기 표현으로 상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 또한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로 볼 수 있겠지만, "하필이면, 본 받아도 비둘기." 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요란떨지 않고 묵묵히 해야할 일을 하는 타부서 팀장더러 '저렇게 커리어 관리 하면 나락간다.' 고 험담을 하거나 타부서와 협력해야 할 때, 공격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업무 메일을 쓰며 틈만 나면 다른 직원의 공적을 가로채는 사람을 닮으라는 말은 악당이 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나 : 팀장 한테 안 닦이려면, 비둘기 과장한테 연락해서 비법 좀 전수해 달라고 해요.
BB : 비위가 약해서 못해요.
'비위가 약해서 악당이 될 수 없다.' 라는 표현은, 누군가에겐 성공가도를 달리기 위한 탁월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패배자의 비겁한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가 마음을 고쳐먹고 성공을 위해 '악당이 되라.' 는 계명을 실천한다면, 모두가 자신의 성취를 부풀리고, 서로를 공격하고, 압도 하려하고, 탈취하려하고, 아래로 끌어내린다면 세상은 폭삭 주저앉게 될 것이다.
악당이 되지 못했거나 악당이 되라는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수차례 공격을 당하면서도 제 자리를 지키기를 선택한 기둥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악당도, 기둥도 되지 못한 나는 열주가 떠받치는 지붕 아래를 거닐고 있을 따름이다. 악당이 빛을 발하는 세상에서, 기둥들이 절망해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리거나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