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서 통화하다가 타야 할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어, 버스 왔다. 끊자." 좌석에 앉자 마자 음악 재생 앱을 켰다. 지난 달에 알게 된 스페인 밴드 노래를 세번 쯤 반복 재생했다. 화염과 피를 부르짖는 후렴구를 계속 듣자니, 노래가 흥겹기는 한데 귓구멍에서 불이 나고 고막에서 피가 흐를 것 같았다. 이어폰을 케이스에 도로 넣으려고 하는데.
바지 앞 주머니, 뒷 주머니, 가방, 어디에도 이어폰 케이스가 없다. 버스에서 내려서 한 번, 기차역 승강장 벤치에 앉아서 한 번 더 주머니와 가방을 뒤적거렸다. 정말, 온데 간데 없다.
무선 이어폰을 잃어버린 건 이번이 두번째다. 횡단보도에서 헐레벌떡 뛰다가 도로에 케이스, 이어폰, 실리콘 팁을 흩뿌린 적이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쓸어 담아서 오른쪽 이어폰과 케이스만 건졌다. 그 마저도 실리콘 팁은 사라지고, 볼륨을 최대로 높여야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새 이어폰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이 날은 버스 안내 방송을 들으려고 이어폰 한 쪽은 케이스에 빼 놓고 있었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왼쪽 이어폰만 덜렁, 남은 것이다. 눈 앞에서 물건을 잃어 버리는 것과 모르는 새에 물건을 분실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아깝게 느껴지냐고 한다면, 영문도 모른 채로 물건을 잃어버리는 쪽이라고 하고 싶다. 사라져 버린 이어폰이 회사 책상 위에 놓여져 있다거나, 홍당무 시장 게시판에 '이어폰 분실하신 분.' 이라는 글이 올라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통근 기차에서도 얼마간 주머니를 더듬다가 단념했다. 이어폰을 두 번 잃어 버리고 나니, '이어폰을 또 사면 내가 등신이다.' 는 생각 마저 들었다. 이어폰이 한 두 푼도 아니고, 귀찮게 매번 충전 해줘야 하고. 오래 끼고 있으면 귀 아프지, 샐 틈 없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서 내려야 할 곳을 지나 치기나 하지. 이어폰을 다시는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생각 하면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비닐 포장을 뜯는 소리가 났다. 눈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객실 통로 건너 자리에 앉은 승객이 빵봉지를 뜯고 있었다. 저녁 시간 쯤 이니, 배가 고플 때도 됐지, 하고 다시 창문에 기댔다.
하아아옵
들숨과 함께 빵이 입 안으로 들어갔다.
쩝, 쩝, 쩝, 쩝.
혀가 입천장에 찰싹 달라 붙었다가 턱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한 짝 남은 이어폰이라도 끼고 있어야 덜 거슬릴 것 같았다. 무방비로 뚫린 반대쪽 귓구멍으로 빵조각이 혀와 입천장 사이에 압착 됐다가 잇몸 새에 꼈다가 세차게 움직이는 혀에 쓸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여정이 들린다. 다른 사람 섭식행동을 이렇게 까지 적나라하게 알고 싶지 않았다. 생생한 저작음은 음소거 할 수도 없었다.
‘빵이 쬐그만하니까, 금방 먹어치우겠지.’
간격이 짧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로 추측한 것이 무색하게, 빵은 조금도 줄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첩, 첩, 첩, 첩. 혀와 빵이 이빨 감옥에 뒤엉켜 레슬링하는 소리가 삼 십분을 이어졌다. 굳이 레슬링에 비유 한다면, 기름을 두르고 맞붙는 튀르키예 전통 씨름처럼 축축한 종류일 것이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휴대폰이 얄팍한 접이식 테이블과 함께 진동했다. 한참 빵과 설전 중인 사람의 것이다. 종이팩에 든 우유를 꿀꺽꿀꺽 넘기고 나서, “어, 어, 난데. 응. 응.” 큰소리로 통화 한다. 이렇게나 다채로운 소리로 신경을 긁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전자 승차권에 있는 승무원 호출 버튼을 한 번 눌러 볼까, 기회를 보고 있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ㅇㅇㅇ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통화 중인 승객을 소심하게 째려보면서 기차에서 내렸다.
통제를 벗어나 사라지는 무선 이어폰과 음소거 할 수도 없는 쩝쩝소리에 통근 시간이 불행해졌다고 여기는 건, 좀 통제광스러운 발상일까? 다시 이어폰을 사면 내가 등신 어쩌고는 공염불에 그치고, 다음 날로 즐거운 쇼핑, 다있어에서 c-타입 케이블이 달린 유선 이어폰을 샀다. 어째, 기술적으로 퇴행한 기분이 든다만.
귀에서 배를 가로질러 주머니로 이어진 검은 줄은 안심이 된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도망가지 못하게 목줄을 잡고 있는 느낌. 인생에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나면 인생이 편댔나, 행복해 진다고 했나, 어디서 줏어 들은 말을 멋대로 곡해해 본다. 짝 안맞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서랍 깊숙히 넣으며, 비선형적 청각 경험으로 부터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