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을 안 한지 오 년쯤 됐다. 거창하게 이름 붙이자면,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 여성은 민낯이어선 안된다는 사회 통념에 대한 전복 행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실천할 수 있는 여성 운동으로 여기고 있다.
오 년간 단 한 번도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네댓 번 정도 화장을 했다. 백이면 백, 친구 결혼식에 초대받았을 때였다. 전통적 성역할 답습의 장인 결혼식에 민낯으로 나타나는 것이야 말로 통념에 반하는 사회운동의 취지가 아니겠니? 이런, 하여자. 미리 자아비판을 한 줄 적어두고.
내가 좋아하는 건덕지가 요만큼도 없는 거대한 악에 맞서는 것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한줌단에게 미움받는 일이 두려운 법이다. 친구들 일생에 한번뿐인 잔칫날에 한 점 얼룩이 될 마음은 없었다. 결혼식에 갈 때가 되면 부옇게 먼지 앉은 쿠션팩트와 립스틱, 브로우 펜슬을 찾았다.
그 마저 작년 가을, 드리의 결혼식을 마지막으로 쿠션형 파운데이션은 버렸다. 자주 쓰지도 않은 퍼프가 바스러져 가루가 됐기 때문이다. 헛웃음을 치며 얼굴에 붙은 검은 부스러기를 털어 낸 기억이 난다.
결혼을 할 만한 친구는 작년에 다 결혼을 해서, 올해 들어선 화장할 일이 전무했다. 드리와 만나기로 한 전날 까지는. 물론, 드리의 두 번째 결혼식은 아니었다.
“저는 내일 연찹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금요일에 드리와 성수동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남들 다 일하는 평일에 출근을 안 한다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째졌다. 퇴근길에 다음 날 가기로 한 식당을 휴대폰으로 검색했다. 그러다가 보도를 침범해 낮게 뻗은 벚나무 가지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걸음을 멈춘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직장 동료가 아닌, 친구 드리는 내 민낯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인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할 땐 마치 노메이크업 협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둘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 덜 뗀 눈곱이 달려 있고, 손질을 잘못해서 머리카락이 날개처럼 뻗치거나 덜 마른 머리카락이 주먹만 하게 뭉쳐 있는 꼴을 다 보고 살았다.
꾸밈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건, 잘 가꿔진 얼굴과 상관없는 일터라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드리가 일터 밖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준 적이 있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 표현, 눈꺼풀 위엔 펄이 든 분홍과 오렌지 색 사이쯤의 음영이 있고, 입술은 생기가 있었다. 직장에서 알던 드리는, 사적인 삶에서의 드리와는 다른 사람일 수 있었다.
같이 다니는 친구가 쪽팔림. 놀러 가면 같이 사진 찍어야 하는데, 늘 쌩얼로 나와서 꾸미고 나온 내가 다 민망함.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서 본 글도 떠올랐다.
그 길로 드럭 스토어로 가서 안색을 보정해 준다는 선블록을 샀다. 왜 선블록인가. 파운데이션은 안 발랐으니 화장까지는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심리적 마지막 저항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앉았다. 홍조와 기미가 흐리게 보일 때까지 베이지색 크림을 얼굴에 문질렀다. 균질하게 발렸는지, 표면에 지문이 찍히지는 않았는지, 모공에 끼지는 않았는지, 목덜미와 얼굴색이 다른지 거울로 살폈다. 색깔이 사라진 눈썹을 회갈색 연필로 칠하고, 입술에 컬러 립밤을 발랐다.
근 일 년 만에 피그먼트로 덮인 얼굴은 당기고 텁텁했다. 당장 씻어 내고 싶었지만, 땀과 유분으로 흉측하게 흘러내리는 종류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화장 아닌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로 저녁 식사를 하고 방청소를 하고 빨래를 널었다. 크림이 땀에 녹아 누런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준은 아님을 확인하고 세수를 했다. 사회적 친분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의 낯짝을 만들어 내기도 보통 일이 아니다, 생각하며 잠들었다.
다음 날, 약속 장소 근처 담벼락에서 드리를 기다렸다.
성수역 내립니당~~ 가게로 갈게융
앞에서 대기 중 성수동엔 외국인 관광객이 많네
나도 성수동은 잘 안 와서 ㅋㅋ 힙하군
너무 힙해서 숨질 것 같음 ㅋㅋㅋ
숨은 쉬자 ㅋㅋㅋㅋ
얼마 후 드리로 추정되는 사람이 멀리서 보였다. 흰 면티, 검은 반바지에 큰 리유저블 백을 메고 있었다. 이쪽에서 손을 흔들면, 그쪽도 손을 흔들었다. 드리는 두 걸음 앞까지 당도했다. 평소라면 무심하게 넘겼을 얼굴도, 내 얼굴 위에 한 겹을 칠하고 나니 관심이 갔다.
“가게들 좀 둘러봤어?”
“여기 있는 가게들은 간판만 봐선 뭘 파는지 영 모르겠더라."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인사하며 슥 마주친 얼굴은 나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안심했다. 작은 점이 보일 정도로 가볍게 바른 크림. 입술엔 립글로스 어쩌면, 립 스테인. 꾸밈의 불균형에 의한 관계 파탄의 위협은 사라진 셈이었다.
‘평소대로 발라야지.’
‘오늘은 점심 먹고 LP 바, 서점 찍을 거니까, 가볍게.’
‘얘랑 약속이니까 이 정도로 해야지.’
외출 전 거울 앞에 서 있었던 드리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길은 없다. 어쩌면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출발과 과정이 어찌 되었건, 우린 민낯이 아니라 한 꺼풀 씌운 얼굴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뻔하게도 지정성별이 반대였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한다 요즘은 그들도 그루밍에 관심이 많고 그 정도는 메이크업 축에도 끼지 못하는 퍼스널 케어 수준의 단장이고 아무도 화장을 하라고 윽박지르지 않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쌩얼로 다녀야 속이 시원하겠냐 유별나게 굴어 참. 밖으로 꺼내는 순간 바싹 따라붙을 반응을 감당키 어려워 입을 다문채로, 새로운 만남이 있을 때마다 거울 앞에 앉아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