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문고리를 돌리고 어깨로 현관문을 밀면서 오른손으로는 날씨를 확인했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고 되어 있었다. 어깨에 멘 가방이 묵직한 것이, 비상용으로 챙겨 다니는 우산은 제자리에 들어 있었다.
퇴근 한 시간 전, 해바라기 수전에서 쏟아지는 것 마냥 세찬 빗줄기가 창문을 때렸다.
"오늘은 제 거 놔두고, 공유 킥보드 타고 퇴근해야겠어요."
매일 전기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차 과장이 창문 앞을 서성이며 말했다.
"뭐? 공유 킥보드를 타면 비를 안 맞나?"
팀장은 비도 오는데 왜 택시를 타지 않냐고 물었다.
"택시 타면 제시간에 기차를 못 타요. 비 맞고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건데, 제 건 비 맞으면 고장 나더라고요."
평균 이상의 방수 등급을 자랑하는 공유 킥보드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스마트 컨슈머라고 해야 할지, 안전불감증이라고 해야 할지. 메일을 쓰는 척하면서 인상을 썼다. 어쨌거나 내 가방엔 우산이 있으니까.
지붕 밑에서 가방 안에 든 우산을 꺼냈다. 끄트머리에 자글자글 레이스가 달린.
'얼굴 점 생긴다. 양산 챙겨 다녀라. 양산 챙겼나?'
'아~ 챙겼다고!'
엄마 잔소리에 마지못해 가방에 넣은 레이스 양산을 철석같이 우산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와 비슷하게 퇴근한 사람들은 장우산을 펼치고 유유히 정문으로, 맨몸으로 주차장을 향해 뛰어갔다. 현관 우산 꽂이에 뷔페처럼 골라 잡을 수 있는 편의점 비닐우산에 시선이 갔다. 집 신발장 속에 살이 부러지고 녹슬고 찢어진 채로 처박혀 있는 일회용 우산이 어림 잡아 다섯 자루는 되는 것 같다. 여기서 잡동사니를 더 늘릴 공간이 있을까?
양산을 펴서 캐노피 안 쪽을 만졌다. 바깥쪽은 레이스로 짠 것처럼 까끌한데, 안 쪽은 도료를 바른 것처럼 매끈했다. 상표에 어쩌고 런던이라고 적혀 있더니, 방수처리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깨 폭 보다 아주 조금 큰 양산을 쓰고 빗속을 걷기로 했다.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 생김새에 비해, 레이스 양산은 쏟아지는 비를 잘 막아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정수리가 뽀송했다. 그런데 어째, 겨드랑이 밑에 밀착한 가방이 축축했다. 캐노피 안쪽을 만져보고 혹시 몰라서 겨드랑이를 더듬어 봤지만, 가방이 젖을 정도의 물기는 없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다가, 양산 끝에 달린 투명한 레이스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가방을 적시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레이스는 정말이지 쓸데가 없다. 방수도 안 되는 데다가, 촌스럽기까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빗물로 축축해진 셔츠, 속옷을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내팽개친 가방에서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가방 겉만 젖은 줄 알았는데, 속까지 축축했다. 타 회사 직원 명함 두장, 천 원짜리가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손끝으로 집어서 살살 떼어냈다. 이북리더기가 물로 흥건했다. 소름이 끼쳤다. 수건으로 싹싹 닦고, 충전기 구멍에 돌돌 만 휴지를 집어넣었다가 빼냈다. 기계 안으로 물이 들어가진 않은 것 같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원을 켰다. 제발, 망가지면 안 돼. 이제 겨우 이북리더기 가격만큼 책을 읽었다고.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보니, 제대로 작동은 됐다.
마지막으로 A6 사이즈 노트를 꺼냈다. 우레탄으로 된 표지에 물이 묻어 광이 났다. 표지만 슥 닦으면. 아닌가? 수첩을 쥐어짜보니 책배에서 물방울이 솟아났다. 비를 피해 간 마른 정수리에서 식은땀이 났다. 고무 밴드를 풀어서 펼쳐 보니 종이가 물을 먹고 우글우글해졌다. 글씨가 번졌다. 그나마 볼펜으로 써서 내용물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유성 잉크에서 수성인 부분만 녹아 글자 주위를 파스텔을 문지른 것처럼, 헤일로처럼 퍼져있었다.
젖은 수첩을 강풍으로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펼쳤다. 젖어서 약해진 낱장이 바람을 못 이기고 꺾였다. 마르기도 전에 찢어질 판이라, 바람 세기를 미풍으로 줄였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후텁지근한 열기가 새어 들어왔다. 노트가 마를 때까지 땀을 흘리며 선풍기 앞에 앉아 있었다.
누렇게 물자국이 남은 노트에 오늘 비 젖은 일기장을 겨우 말렸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