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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링과 마치스모

키링에서 시작된 급발진과 뇌절

by 김몽콕 Jan 22. 2025

 동호회 송년회에서 한 회원이 일러스트레이션 박람회에서 산 이어폰 케이스 고리를 꺼내 자랑했다.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한 번씩 인상 쓴 강아지가 든 아크릴 조각을 만지작 거렸다. 내 차례가 왔을 때, 강아지의 찌푸린 미간을 문지르며 "귀엽다."라고 말하면서도 요오상한 반감을 느꼈다. 그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는데, 맞은 편의 다른 사람이 "난 몽콕이 요즘 톡방에서 쓰는 쿼카 캐릭터의 작가를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당황해서 "나돈데!" 라든가 "진짜요?" 정도의 대답을 기대했을 상대방에게 절대 그 쿼카 이모티콘은 돈을 주고 구매한 것이 아니고, 은행에 적금을 들어서 사은품으로 받았을 뿐이며, 한 달 후면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에 지금 열심히 쓰고 있을 뿐이라며 알고 싶지 않았을 사실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면서 젖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누가 봐도 그건 평범한 답변이 아니었다.
 '몽콕, 너는 찐따란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필사적으로 변명하려고 했던 걸까. 나중에라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 상대방이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평범한 대답을 하려면, 이 급발진의 원인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들은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체질이라고? 그건 잘못된 진술이다. 귀여운 것을 봤을 때, 경직된 몸이 느슨해지는 느낌을 좋아한다. 산책하다가 강아지를 둘러싸 앉은 할머니들을 본 적이 있다. 한 할머니가 작은 강아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요즘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고 묻고, 질문을 받은 강아지는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큰 눈으로 리드줄을 잡은 할머니를 쳐다봤다. 주인 할머니는 말할 수 없는 강아지를 대신해서 “요즘 입이 짧아져서…”라고 대답했다. 그 장면을 끝까지 보려고 발을 질질 끌며 지나갔다. 나는 귀여운 물건을 몸에 지니면 은탄환에 맞은 마귀처럼 사멸해 버린다. 그럴 리가 없지?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타 부서 직원 BB로부터 직접 그린 산타 모자를 쓴 강아지 낙서를 선물로 받았다. 쪽지는 일기장의 한쪽에 잘 붙여뒀다. 쓰잘데 없이 귀엽기만 한 물건을 돈 주고 사면 가계가 휘청거리고, 누적된 가계 부채로 말미암아 경기가 침체되고, 사회가 무너진다며 물건의 실용적 가치만을 따지는 눈엔 팬시상품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다. - 역시 틀려 먹었다. 침대 아래 서랍장, 티브이 위에 늘어선 관광지에서 산 인형들이 현재 귀여움으로 그 쓸모를 다 하고 있는 중이다.

 자가 진단 결과를 종합해 보면, 나는 귀여운 걸 좋아하고 귀여운 물건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매하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에 관한 질문을 하면 사상 검증을 당한 것 마냥 펄쩍 뛰는 이상한 사람이다. 비교할 만한 예를 찾아보자면, 은밀한 중에 자신의 방에 헬로 키티의 성전을 구축한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갱이나 ‘이놈의 똥개 X끼 갖다가 버려야 하는데.’를 입에 달고 사는 개아범과 비슷할 것이다.
  마! 니 마초가?
내가 마초 집단의 마초라면, 동료들의 비난과 배척을 피해 귀여운 것들에 대한 선호를 숨길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마초도 아니고, 마초 집단에서 한 자리를 맡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귀여운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쟤는 회사에 놀러 다니는 것 같아."
"역시, 여자분들이 그런 걸 좋아하더라고요."
노골적이거나, 정중하게 포장된 마치스모가 손 뻗치는 것을 자주 봤을 뿐. 귀여운 물건을 소지한 것과 전문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귀여운 물건을 소지한 한 사람이 그가 속한 집단의 취향을 대표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가도  '저런 식'으로 표적이 되지 말아야지. 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말자고 꾹꾹 누르며 위장한 결과, 유사-마초의 태도를 장착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흥겨운 송년회 자리에서 급발진을 해버린 건, 사회적 자아 갈아 끼우기 과정 중에 오류가 생겨버린 거지.  자아 스위칭 프로세스에 실수가 없도록 ‘입을 열기 전에 생각을 했나요?’를 거듭 마음에 새길 테지만,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나와 마치스모로부터 방어적인 내가 동시에 존재하는 한, 급발진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애초에 유독한 마초가 주변에 없었다면, 유사-마초인 나도 필요가 없을 것인데.

 요즘 떠오르는 소비 경향 중 하나를 무해함이라 들었다. 첫눈에 보는 순간 "햐, 귀엽다."는 인상 외엔 어떤 잡념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작고 깜찍한 팬시상품이 잘 팔린다는 의미라고. 여전히 귀여운 물건을 두고서 이러쿵저러쿵 말 얹기 바쁜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어떤 가치 판단도 허락하지 않는 궁극의 귀여움을 지닌 상품은 개발되지 않은 것 같다. 깜찍한 것에 눈살 찌푸리는 마치스모를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게 할 수 없다면,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나를 숨기지 않을 방법은 한 가지뿐인 것 같다. 귀여운 물건에 대한 선호가 한 철 유행이 아닌,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되는 것. 그 언젠가 작고 귀여운 것들의 메시아가 나타나 마초들로 하여금 복슬복슬하고 말랑말랑한 키링을 달게 하라. 귀여움이여, 널리 퍼져라.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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