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슬> 소설 연재
꿈속에서 태용은 고시원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틈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은 온통 밝은 빛으로 가득해서 그는 눈을 뜨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태용은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이렇게 밝은 거지?’
빛은 책상 위에서 나오고 있었다. 책상 위에 아주 강한 빛을 내뿜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태용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것을 만져봤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구슬만한 구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작은 구체에서 어찌나 환한 빛이 나오는지 방 안이 온통 빛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구슬은 예상과 달리 살짝 차가웠다. 그리고 매끄럽고 묵직했다.
‘이것이 무한의 소설구슬이구나.’
태용은 떨리는 두 손으로 구슬을 들고 있다가 구슬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이걸 삼키면 난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는 거야. 무한의 창조자가 되는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 속에 구슬을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태용은 놀라서 사방을 둘러봤다. 여긴 어디지?
그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린 바닥에 누운 채 이불을 덮고 있었다. 태용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누군가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키가 작은 소년이었다. 갈색의 긴 옷을 입은 소년은 태용이 일어난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라기는 태용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어디죠?”
태용이 묻자 소년은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니 저기......”
잠시 후 소년이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젊은 여자 한 명이 따라 들어왔다. 여자도 소년처럼 갈색의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일어나셨나요?”
여자가 묻자 태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초원 위에 쓰러져 있던 걸 우리가 발견했습니다. 당신,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여자는 웃으면서 그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태용은 물병을 받아서 게걸스럽게 마신 뒤 그녀에게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근데 여러분은 누구인가요?”
“우린 키야드 부족이에요. 전 부족장 호라진이고요.”
호라진은 옆에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쪽은 내 동생 이루진.”
소년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태용도 손을 흔들었다.
“안녕. 저는 이태용이라고 해요.”
“어쩌다가 이 넓은 평원 한가운데에서 쓰러져 있었나요?”
호라진의 물음에 태용은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런 그를 호라진은 빤히 바라보았다.
호라진은 크고 긴 눈을 가진 늘씬한 미인이었다. 태용은 그녀의 코가 깎아 만든 것처럼 반듯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호라진이 긴 속눈썹을 깜박이며 새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계속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태용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 이야기가 굉장히 긴데, 전 발카르 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요?”
“제가 발카르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목으로요.”
그러자 호라진과 이루진은 깜짝 놀랐다. 태용은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거짓말이에요. 전 발카르 왕을 죽이려 하지 않았고, 누구도 죽이려 하지 않았어요.”
“누명을 썼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그게 그러니까, 이야기 좀 긴데.....”
그러자 호라진은 손을 들었다.
“알겠어요. 그럼 시장할 텐데 먼저 우리랑 같이 식사부터 하는 게 어때요? 뭐 좀 먹으면서 설명해 주시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태용은 자신이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처럼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달았다.
천막 밖으로 나오자 여러 개의 천막들과 천막들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호라진과 이루진처럼 부족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천막 곳곳에 말들이 서 있었고, 천막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양떼가 풀을 뜯고 있었다.
태용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다. 그 중에서 어린 아이들은 태용에게 다가와 태용의 몸을 만져보며 신기해했다. 태용이 간지러워서 웃자 아이들도 깔깔거렸다.
태용은 호라진과 이루진을 따라서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의 식탁 위에는 음식들이 차려 있었다. 호라진이 태용에게 자리를 권했다.
“드시죠, 시장해 보이는데.”
태용은 고맙다고 말하며 식탁 앞에 앉아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남매는 그런 태용을 보며 웃었다.
“진짜 배고팠나 보다.”
이루진이 중얼거렸다.
음식이 뱃속에 들어가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차려진 음식은 양고기와 말린 빵과 채소, 그리고 몇 가지 특이한 음식들이었다.
호라진이 빵을 한 조각 입에 넣으며 물었다.
“이름이 이태용이라고 했죠? 이태용 씨는 발카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나라에서 오셨죠?”
“전 마한 사람이에요.”
호라진이 눈썹을 치켜떴다.
“상당히 먼 나라에서 오셨군요.”
“마한이 어디야?”
이루진이 누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나라야.”
호라진은 다시 태용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먼 나라에서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리고 어쩌다가 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신 거죠?”
태용은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고시원 자취방에서 출발하여 어쩌다가 후스타이 초원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게 되었는지 전부 이야기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호라진과 이루진은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태용이 이야기를 마치자 남매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로군요.”
호라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태용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돌렸다.
“근데 곰이랑 맨주먹으로 싸워서 이겼다는 게 진짜에요?”
이루진이 물었다.
“그럼, 발카르에서는 아주 유명한 일이야. 뉴스에도 나왔어.”
“하하, 말도 안 돼.”
이루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라니까. 인터넷에서 한 번 찾아봐. 내가 곰을 쓰러뜨리고 발카르 공주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어.”
“알겠어요, 믿을게요.”
호라진이 말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 넓은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곰을 때려잡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발카르 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게 정말이겠죠?”
“당연하죠. 발카르 왕은 죽지도 않았어요. 멀쩡히 살아 있다고요. 모든 건 그 총리대신이 저에게 씌운 누명이에요.”
호라진은 아름다운 눈썹을 찡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뭔가 좀 이상하군요. 총리대신은 왜 그렇게 그 구슬에 집착하는 걸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그 사람도 저와 같은 사람인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좀 맹목적인 사람 같았어요. 그 역시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죠.”
“무한히 위대한 소설이라......”
호라진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누나 옆에 있던 이루진이 물었다.
“그럼 형은 그 구슬을 왜 그렇게 열심히 찾는 거예요?”
“말했다시피 그 구슬을 삼키면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으니까.”
“그럼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왜 쓰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 말에 태용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난 위대한 소설가가 되고 싶어. 그러려면 위대한 소설을 써야 해. 그리고 만일 내가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쓰게 된다면, 나는 무한히 위대한 소설가가 되는 거잖아. 난 그게 너무나 되고 싶어. 그게 내 소원이고,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야. 나는 내가 그것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
“멋지군요.”
호라진이 말했다.
“태용 씨 같은 사람은 오랜만에 봐요.”
호라진은 호기심과 흥미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호라진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태용은 다시 부끄러워져서 얼른 이루진에게 질문을 했다.
“이루진, 네 꿈은 뭐야?”
“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어른이 되어서 뭘 하고 싶은데?”
그러자 이루진은 살짝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후스타이 초원이 모든 부족들을 전부 통일할 거예요.”
태용은 눈을 치켜떴다.
“와, 그거 진짜 멋있는데? 초원에 부족이 얼마나 되는데?”
“후스타이 초원에는 전부 여든 한 개의 부족이 있어요.”
호라진이 설명했다.
“태용 씨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후스타이의 우리 유목 민족은 수천년 동안 서로 약탈과 전쟁을 거듭하고 있어요. 우린 그래서 언젠가 이 초원을 통일하고 모든 싸움을 멈출 영웅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바로 그 영웅이죠.”
이루진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태용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루진, 너도 정말 커다란 꿈을 갖고 있구나. 아주 멋져.”
호라진도 웃으면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루진은 기분 좋게 웃다가 다시 태용에게 물었다.
“그럼 형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발카르 군사들에게 쫓기고 있잖아요.”
그 말에 태용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게 말이야. 발카르 왕국 전체가 나에게 수배령을 내렸으니, 발카르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겠어.”
“발카르에 가시면 안 되죠.”
호라진이 말했다.
“그곳으로 가면 당신은 죽을 거예요. 마한으로 다시 돌아가세요.”
“안돼요. 소설구슬을 찾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요?”
그 말에 태용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요.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반드시 소설구슬을 찾아야 해요. 전 그걸 찾기 위해서 온갖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구슬을 찾을 겁니다.”
“어떻게요?”
“음, 그건......”
호라진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태용을 잠시 응시하다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좋은 방법이 생길 때까지 당분간은 우리와 함께 지내세요. 이루진과 같은 천막을 쓰시면 될 겁니다. 이루진, 괜찮지?”
그러자 이루진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난 좋아.”
호라진이 다시 말했다.
“전 개인적으로 태용 씨가 위험을 감수하지 말고 이제 그만 마한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태용 씨의 의견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제가 참견할 수는 없겠군요. 여기서 당신은 손님이에요. 편하게 지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태용은 거듭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태용은 그날부터 키야드 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키야드 부족은 초원을 돌아다니며 사는 전형적인 유목민이었다.
오 년 전까지만 해도 키야드 부족을 이끌던 것은 호라진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다른 부족이 침략해 호라진의 부모가 모두 죽은 후 젊은 딸이었던 호라진이 부족장이 되었다. 태용이 호라진과 이루진을 따라다니며 보기에 호라진은 부족민들에게 다정하고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부족 사람들은 이방인인 태용을 처음에는 약간 어려워했지만, 이내 다들 그와 친해졌다. 태용이 보기에 부족민들은 하나같이 애나 어른이나 성격이 시원스럽고 살가웠다. 부족의 아이들은 태용에게 그의 모험을 들려달라고 반복해서 졸랐고, 그럴 때마다 태용은 이미 했던 이야기를 반복해야 했다. 아이들은 이미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으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즐거워했다. 어른들 역시 간식이 있을 때마다 태용에게 나눠주곤 했다.
대부분의 부족민들은 태용이 절대무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태용을 볼 때마다 ‘절대무공’이라고 부르며 놀리곤 했다. 하지만 태용은 그들이 그렇게 놀릴 때마다 자신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그들이 결코 악의 섞인 조롱을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태용은 천막 안에서 이루진과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이루진은 태용에게 먼 나라 마한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태용 역시 이루진과 부족 사람들에게 궁금한 것을 묻곤 했다.
“이건 비밀인데요, 우리 누나는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아직도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어느 날 밤 이루진이 말했다.
“누나는 항상 씩씩하고 괜찮은 척 해요. 하지만 전 알 수 있어요. 누나는 부모님이 전쟁에서 돌아가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태용이 물었다.
“너는 어떠니?”
“저도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래도 누나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어요. 그럼 누나가 많이 슬플 테니까요.”
태용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루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루진, 슬프면 슬프다고 말해도 돼. 적어도 네 나이에는 그래도 돼. 물론 네가 슬퍼하는 걸 보면 누나도 슬퍼하겠지. 하지만 누나 걱정을 하느라 어린 네가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러자 이루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럼 누나는 누가 위로해 줘요?”
“누나에게는 네가 있잖아. 그리고 부족 사람들도 모두들 누나를 좋아하잖니. 누나는 비록 부모님을 잃었지만 그래도 항상 곁에 든든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할 거야.”
태용은 손등으로 이루진의 눈물을 닦아 줬다.
“있잖아요, 형이 제 진짜 형이었으면 좋겠어요.”
“진짜 형이라고 생각하렴.”
“하지만 형은 곧 떠날 거잖아요. 소설구슬을 찾아서.”
“지금 당장은 아니야.”
태용은 이루진이 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태용은 이루진이 잠든 뒤 천막 밖으로 나와 천막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초원의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떠 있었다. 그가 살던 도시에서는 맑은 밤에도 별을 몇 개 볼까말까 했는데, 이곳에는 모래처럼 많은 별들이 하늘에 흩뿌려져 있었다.
“잠이 안 오세요?”
태용이 뒤를 돌아보자 호라진이 서 있었다.
“부족장님은요?”
태용이 묻자 호라진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잠이 안 와서요.”
호라진이 태용의 옆으로 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러자 호라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태용 씨는 정말 소설 생각밖에 안하는군요. 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저한테는 소설이 별이니까요.”
호라진이 고개를 돌려 태용을 바라보았다.
“우린 위대한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 별을 볼 때마다 항상 부모님이 생각나요.”
태용은 그녀의 눈에 별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태용 씨가 제 동생을 위로해줬다고 들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 호라진의 눈은 슬픔과 고마움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 태용도 약간 슬퍼졌다.
태용이 말했다.
“이루진은 정말 어른스러운 아이 같아요. 누나가 슬플까봐 슬픈 내색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전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태용은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호라진, 기운을 내요.”
그러자 호라진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전 기운을 내야 합니다. 제가 부족장이니까요. 이루진의 누나이기도 하고.”
“아니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태용의 말에 그녀는 그를 쳐다봤다.
“난 당신이 책임감을 내려놓고 당신 자신만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항상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말이에요.”
호라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전 키야드의 부족장입니다. 저에게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그럼 당신이 너무 힘들어지잖아요.”
태용의 말에 호라진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걱정돼요?”
“네.”
태용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전 당신이 안쓰러워요. 젊은 나이에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게 안타까워요. 물론 당신은 훌륭한 부족장이지만,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그것 때문에 당신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태용을 바라보는 호라진의 얼굴에 미약한 슬픔의 미소가 번졌다.
“이게 내 운명이에요.”
“에이, 운명 같은 게 어디 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면 되는 거죠. 아, 물론 당신에게 부족을 버리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부족 사람들을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지쳐서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걸 그만 내려놓고 싶다면, 용기를 내서 내려놓을 필요가 있어요. 당신의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당신을 비난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그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에게 부족 사람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말을 어길 수가 있겠어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태용은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 어렸을 때부터 평생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다가, 저에게 넌 글쓰기에 재주도 없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니 절대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제가 뭐라고 한지 아세요?”
태용은 호라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했어요.”
그러자 호라진은 경악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태용은 낄낄거렸다.
“그래요, 버릇없는 말이죠.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전 그 때나 지금이나 제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호라진, 우리 인생은 한번뿐이에요. 게다가 되게 짧아요.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릴 시간이 없어요.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을 제대로 살기에도 인생이 너무 짧다니까요. 전 당신이 그냥 단순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내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살거든요. 당신도 가끔은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행복하길 바라세요?”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태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이루진 둘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한참동안 별빛 아래에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