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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Aug 01. 2024

12화. 궁전에서

<소설구슬> 소설 연재

 태용은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을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몇 가지는 확실히 기억나는 게 있었다. 예를 들면 발카르 왕국의 공주가 직접 그의 목에 메달을 걸어준 것이 그랬다.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공주는 하얀 모자를 쓰고 모자와 같은 색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공주는 그의 목에 금으로 만든 메달을 걸어주며 뭐라고 말했지만 긴장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태용에게는 뭐라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관중들이 워낙 시끄럽게 떠들고 있어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태용은 공주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경기장 밖으로 향했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자 의료팀이 그의 셔츠를 가위로 자른 뒤 상처를 소독했다. 약간 따끔했지만 참을 만했다.

 다행히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태용은 목에서 메달을 벗어 만져봤다. 메달은 상당히 묵직했다.

 대기실 안으로 기자들이 뛰어 들어와 태용의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자 태용은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렸다. 의사들이 기자들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경기장 직원들이 기자들을 내보낸 뒤 대기실 문을 닫자 조금 조용해졌다.

 의사들이 태용의 상처를 소독한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줬다. 태용이 물었다.

 “묵탄은 어떻게 됐어요?”

 붕대를 감던 의사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보셨다시피 죽었죠.”

 “네, 그건 알아요.”

 태용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의사가 붕대를 다 감자 태용은 샤워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의사가 괜찮다고 해서 태용은 대기실 옆에 있는 샤워실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양복을 입은 사람 몇 명이 대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태용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태용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들이신가요?”

 “아닙니다. 저희는 궁전에서 나왔습니다. 선생님을 폐하에게 데려가기 위해 왔습니다.”     

 태용은 그들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발카르의 궁전으로 향했다. 리무진은 태용이 이전에 온 적 있는 광장을 지나서 궁전의 대문 앞에 도달했다.

 대문이 열리고 리무진은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리무진은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서 궁전 본관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린 태용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태용은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홀을 지나서 넓은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이곳에서 잠시 쉬고 계십시오. 이제 곧 폐하와 함께 식사를 하실 것입니다.”

 직원은 그렇게 말한 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태용은 화려한 방 안을 잠시 둘러보다가 커다란 소파 위에 앉았다.

 드디어 궁전에 들어오는데 성공했어. 그는 생각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어.

 이곳 어딘가에 무한의 소설구슬이 담긴 금고가 있다. 거대한 금고니까 아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랐다. 한 모금 마셔보니 시원하고 향긋한 차였다. 차를 마시자 그는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이 조용하고 아늑한 곳에 있으니 방금 전까지 곰과 치고 박고 싸우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아주 생생한 꿈이었다. 그는 곰에게 찢겨지던 묵탄이 생각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 문이 열리더니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

 “폐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향한 곳은 커다란 수정 샹들리에가 달린 넓은 방이었다. 사방이 호박색으로 빛나는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넓은 식탁이 있었고, 식탁 앞에는 발카르 왕국의 왕이 앉아 있었다.

 태용은 왕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왕은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태용은 감사하다고 말한 뒤 왕의 맞은편에 앉았다.

 왕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적당히 마른 체격에 인상이 부드러워 보였다. 태용은 그의 인상이 선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그가 검투사들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곰과 싸우게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 생각을 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자네가 맨주먹으로 곰을 때려잡는 모습을 직접 봤네. 정말 대단하더군.”

 “감사합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궁전의 직원들이 왕과 태용의 앞에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왕이 술병을 들어 태용에게 포도주를 따라줬다. 태용은 감사하다고 말한 뒤 한 모금 마셨다.

 “살면서 많은 검투 경기를 봤지만 자네 같은 용사는 처음 보네.”

 왕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결승전에서 곰과 싸우도록 갑자기 규칙을 바꾸긴 했지만, 난 두 사람이 곰을 이기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네.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사람들이 원하는 건 피와 살육이니까. 그런데 자네가 보란 듯이 곰을 때려죽이더군. 정말 놀라워! 자네가 곰뿐만 아니라 나한테도 한 방 먹인 거야.”

 왕은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태용은 어이가 없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왕과 태용 앞으로 계속해서 음식이 나왔다. 당연하지만 태용이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태용은 식사를 하면서 왕이 하는 말을 듣다가 왕이 질문을 하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왕이 말했다.

 “자네는 이제 부자가 되겠군. 대단한 보물을 받을 테니 말이야.”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태용이 말했다.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는 보물 대신 다른 것을 받았으면 합니다.”

 “어떤 걸 말인가?”

 “발카르 군사들이 기계도시에서 가져온 커다란 금고를 받고 싶습니다.”

 왕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기계도시의 금고?”

 “예. 몇 년 전에 발카르 군사들이 기계도시에서 커다란 금고를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물 대신 그 금고를 받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왕은 잠시 태용을 쳐다보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거 말이로군. 근데 왜 그걸 원하는가?”

 태용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 안에 소설구슬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소설구슬? 그게 뭐지?”

 “위대한 소설을 쓰게 해주는 신비한 구슬입니다. 저는 평생 훌륭한 소설을 쓰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구슬을 찾아서 먼 마한에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폐하께서 제가 그 구슬을 가져가서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게 해주신다면, 평생 폐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겠습니다.”

 왕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설구슬이라니, 그런 물건이 정말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자네는 그게 그 안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제 고향에서 만난 어떤 로봇에게 들었습니다. 그 로봇은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로봇인데, 제가 그 로봇을 도와주자 답례로 소설구슬의 존재에 대해 알려줬습니다.”

 왕은 잠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태용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특이한 일이로군. 세상에 소설구슬 같은 게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그게 그 금고 안에 있었다니. 하지만 그 금고는 나에게 없네.”

 “예? 그럼......”

 “기계도시에서 그 금고를 가져오라고 명령한 건 내가 아닐세. 그건 총리대신이 시킨 일이네.”

 태용은 놀라서 눈을 치켜떴다.

 “총리대신이요?”

 “그렇지. 총리대신은 그 안에 진귀한 보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금고를 가져오라고 시켰지. 하지만 금고를 여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어. 그 금고는 비밀번호를 알아야 풀 수 있거든. 그래서 총리대신은 금고를 부수려고 애썼는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군. 그런데 자네는 그 금고의 비밀번호를 아는가?”

 “예, 그 로봇이 말해줘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총리대신에게 한 번 말해보지. 물론 총리대신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네에게 순순히 넘겨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왕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마 총리대신은 자네에게 구슬을 줄 걸세. 총리대신이 소설을 쓸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아무튼 내가 그에게 말해보겠네.”

 태용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왕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궁전에 처음 들어왔을 텐데, 들어와 보니 어떻던가?”

 “굉장히 넓고 호화롭습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그럼 궁전에서 며칠 더 머물다 가게. 머물면서 내 군사들에게 무술도 좀 알려주고.”

 왕은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용도 따라서 일어났다. 왕은 그를 다시 한 번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는 아무리 봐도 곰을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자네한테는 소설을 쓰는 일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용은 진심으로 말했다.     

 왕과 식사를 마친 뒤 태용은 자신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방은 아까 들어간 응접실만큼 넓고 호화로운 방이었다. 궁전 직원은 그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달라고 말한 뒤 방을 나갔다.

 태용은 잠시 방을 둘러보다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커다란 침대는 아주 푹신했다. 태용은 침대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금고를 왕이 아니라 총리대신이 가져갔던 거로군. 그래도 왕이 흔쾌히 금고를 주겠다고 해서 다행이야. 그런데 총리대신이 금고를 주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일단은 왕에게 최대한 간청해 봐야겠다. 왕의 충직한 신하가 되겠다고 제안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왕은 소설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맨손으로 곰을 때려잡은 용사를 얻을 수 있다면 소설구슬을 쉽게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총리대신도 왕의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하겠지.

 태용은 자리에서 일나 방 옆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샤워를 한 뒤 옷장 안에 있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가슴까지 덮자 이런저런 상념이 들었다.

 여기까지 참 힘들게 왔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노예가 되기도 하고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이곳에 들어왔네. 그는 자신이 살던 고시원 자취방을 떠올리며 방 안을 둘러봤다. 아마 이 방의 옷장이 고시원 방보다 더 클 것이다.

 정말 사람 인생은 모르는 것이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태용이 잠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나오자 궁전 직원이 방 안으로 들어와 아침이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태용은 옷을 갈아입고 직원을 따라서 작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궁전의 귀빈들이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태용은 널찍한 식탁 하나를 혼자 쓰면서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그가 황홀한 식사를 끝내고 있을 즈음 직원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식사가 끝나시면 저와 함께 가시죠. 총리대신 각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태용은 알겠다고 말한 뒤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직원을 따라서 식당을 나갔다. 태용은 직원을 따라 궁전 내부를 한참동안 걸어간 끝에 홀 끝에 있는 문 앞에 이르렀다. 문 앞에 있는 경비병에게 직원이 설명하자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경비병이 문을 열어줬다.

 그곳은 태용의 방보다 더 넓고 화려한 방이었다. 좌우 벽에 책장이 여러 개 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탁자가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용은 방 안을 둘러보며 잠시 서성였다. 그 때 책장 옆에 있는 작은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온 몸을 휘감은 회색의 긴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키는 태용보다 약간 작았고, 특이하게도 머리에 두건까지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특이한 건 그가 얼굴에 쓰고 있는 검은색 가면이었다.

 방 안에 들어온 가면이 태용을 쳐다봤다. 가면이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태용은 그 사람의 나이나 성별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손에 장갑까지 끼고 있어서 손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용을 잠시 쳐다보던 그 사람이 탁자로 걸어가 의자에 앉은 뒤 물었다.

 “자네가 이태용인가?”

 그 말에 태용은 그제야 그 사람이 총리대신이라는 걸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가면 뒤에서 깊은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폐하에게 보물 대신 기계도시에서 가져온 금고를 달라고 청했단 말이지?”

 태용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금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는가?”

 “소설구슬이 들어 있습니다.”

 총리대신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아는가?”

 “제 고향에서 어떤 로봇을 도와준 일이 있습니다. 그 로봇은 제가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답례로 소설구슬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습니다.”

 “로봇이 알려줬다고?”

 “네.”

 총리대신은 잠시 침묵했다. 태용은 가면 너머의 남자가 어떤 얼굴일지 상상했다. 목소리로 추정하건대 그는 아주 근엄한 인상일 것 같았다. 나이는 왕과 비슷한 나이일 것 같았다.

 “그럼 그 금고의 비밀번호도 로봇이 말해줬는가?”

 그 말에 태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예.”

 “비밀번호가 뭔가?”

 태용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뭐라고 대답하지?

 총리대신이 다시 말했다.

 “나에게 말할 수 없나?”

 “그건......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태용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총리대신 각하, 저는 그 소설구슬을 찾아 먼 마한에서 이곳 발카르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구슬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고 검투사 대회에 참가했고, 곰과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에게 많은 보물을 상으로 내리신다고 했지만, 저는 그 어떤 보물도 원치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소설구슬을 얻어서 그걸로 위대한 소설을 쓰는 것뿐입니다. 저는 평생 훌륭한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재능이 없어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등단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작가가 되고 싶은 나머지, 평생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곰과 싸웠습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저에게 소설구슬을 주신다면, 저는 평생 각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며 제가 쓴 소설을 각하에게 헌정하겠습니다. 부디 이 부족한 인간에게 작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말을 마친 태용은 고개를 숙이고 총리대신의 허락을 기다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훌륭한 소설가가 되는 것이 너의 평생의 꿈이라고?”

 총리대신의 말에 태용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태용은 가면 너머의 얼굴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했다. 호기심과 흥미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까? 아니면 귀찮다는 표정?

 “너는 네가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태용은 당황했다. 그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하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그 소설구슬이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쓰게 해준다는 걸 이 사람이 어떻게 아는 거지? 나는 그런 것까지 왕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태용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총리대신이 그 사실을 아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리대신 역시 소설구슬에 대해 알고 있는 로봇을 만났을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라. 너에게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총리대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감정했지만 조금 거칠어졌다. 태용은 약간 겁이 났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뭔가?”

 “제가 그것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원한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위대한 소설을 쓰고 읽을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훌륭한 작품을 쓴다면 인류의 문학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는 자격이 한 명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면, 소설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무한의 소설구슬을 얻기 위해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왔습니다. 죽음의 위기 역시 수차례 넘겼습니다. 저는 제가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총리대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 안에 잠시 불안한 침묵이 흘렀다. 태용은 직감적으로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면,”

 총리대신이 입을 열었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열심히 읽고 글을 열심히 써야 할 일이다.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고 곰과 싸운다는 게 말이 되는가? 너는 지금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

 태용은 눈을 치켜떴다. 이 사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넌 네가 간절하기 때문에 그 구슬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했지. 하지만 네가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유치한 오만이다. 겨우 그 정도로 감히 무한의 창조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나 역시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그리고 나의 간절한 마음이 너보다 더 크다고 자부한다. 나는 무한의 소설구슬을 가질 진정한 자격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태용은 경악했다.

 ‘이게 뭔 소리야?’

 “물론 너는 곰과 싸워 이기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니 너에게 많은 보물을 상으로 내리겠다. 네가 원한다면 너에게 관직도 주겠다. 하지만 소설구슬은 나의 것이다. 그러니 금고의 비밀번호를 말하라.”

 태용은 자기가 입을 벌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 가면을 쓴 남자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정말로 그 구슬이 필요합니다. 각하, 제발 부탁드립니다. 부디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지만 검은 가면은 그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태용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각하,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이 미천한 인간에게 소설구슬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 하신다면 제가 평생 각하의 은혜를 뼈에 새기겠습니다. 저는 그 구슬이 진짜로, 진짜 너무 갖고 싶어요!”

 그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보물도 관직도 원치 않습니다. 제가 이 삶에서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뿐입니다. 만약 제가 소설구슬을 삼키고 위대한 작품을 쓴다면, 그 책의 인세의 절반을 각하에게 드리겠습니다.”

 “인세?”

 “그렇습니다. 인세의 절반을 각하에게......”

 “이런 멍청한 놈!”

 총리대신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내가 그딴 걸 바라는 줄 아느냐! 어디 감히 그 따위 더러운 제안을 하느냐!”

 태용은 놀라서 고개를 들고 가면을 올려다봤다.

 “너같이 미천한 놈이 감히 무한의 창조자가 되려 한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그저 힘만 세고 싸움만 잘하는 놈이 감히 무한한 예술적 위대함을 탐내느냐!”

 총리대신은 장갑 낀 손으로 태용을 가리켰다.

 “너의 뛰어난 무공을 아깝게 여겨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비밀번호를 말하라!”

 태용은 긴장해서 몸이 떨렸다. 그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총리대신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들어와라!”

 그러자 뒤쪽에 있는 문과 책장 옆에 있는 문이 모두 열리면서 권총을 든 남자들이 뛰어 들어왔다. 태용은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방 안은 총을 든 남자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태용을 에워싸고 총으로 태용을 겨냥했다.

 여전히 탁자에 앉아 있던 총리대신이 말했다.

 “비밀번호를 말하라.”

 태용은 덜덜 떨면서 황급히 말했다.

 “각하,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지만 가면을 쓴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면 뒤에서 천천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 명령이다. 비밀번호를 말해.”

 태용은 식은땀이 등 뒤를 흐르는 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말해야 하나? 하지만 비밀번호를 말하면 총리대신은 곧바로 방을 나가서 금고로 가 구슬을 꺼내 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이다.

 순간 태용은 온 몸의 세포가 긴장으로 뭉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몸이 위험 앞에서 자동적으로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열 개가 넘는 권총이 그를 겨누고 있었다. 이 방에서 살아서 나가려면 방아쇠에 걸쳐진 열 개가 넘는 손가락들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태용이 말을 하지 않자 총리대신이 한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이 태용에게는 느린 움직임으로 보였다.

 “놈을 쏴라.”

 총리대신이 말했다.

 그 순간 태용은 아래로 몸을 숙였다. 그의 머리 위로 총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태용은 옆으로 몸을 굴려 남자 몇 명을 쓰러뜨리며 지나갔다. 그리고는 아무거나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누군가의 다리가 잡혔다. 그는 발딱 일어나 남자의 몸을 사람들에게 던졌다. 총성과 함께 총알 몇 개가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태용은 몸을 날려 들어왔던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문이 부서지면서 그는 복도로 굴러나갔다.

 그는 재빨리 부서진 문을 들어 올려 몸을 가렸다. 총알이 날아와 문에 박혔다. 그는 문을 들고 복도를 가로질러 날듯이 뛰어갔다.

 뒤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총알이 계속 날아왔다. 복도로 나오던 궁전 직원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태용은 그들 사이를 지나 달리다가 복도를 뛰어나왔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홀이 있었다.

 태용은 들고 있던 문짝을 내려놓고 아무 통로나 들어가서 미친 듯이 달렸다. 그 순간 궁전 전체에서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아마 궁전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다. 당장 궁전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가 달려가던 복도의 끝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달려오는 태용을 보자마자 권총을 뽑았다. 태용은 옆 방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문을 닫아 잠근 뒤 방 안을 둘러봤지만 이 방에 다른 출구는 없었다.

 태용이 뒤돌아서는데 총알 하나가 문을 뚫고 들어와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벌써 군인들이 방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태용은 문으로 나가려던 걸 단념하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 아래로 저 멀리 궁전의 정원이 있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그 순간 문이 부서져 나갔다.

 태용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창밖으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창틀을 잡은 뒤 몸을 날려 아래쪽의 다른 창틀을 움켜잡았다.

 그는 창문 몇 개를 지나서 아래로 내려갔다. 저 위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그는 건물 벽에서 몸을 던져 궁전의 지붕 위에 착지했다.

 총알이 날아와 그의 옆에 있는 기와를 깨뜨렸다. 그는 전속력으로 지붕 위를 달렸다. 달리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진 기와를 밟고 떨어질 뻔했다. 그는 더 낮은 건물의 지붕 위로 뛰어내린 뒤 그곳에서 땅을 향해 뛰어내렸다.

 태용은 꽃이 가득한 정원 위에 착지했다. 그는 꽃을 헤치며 정신없이 달리다가 허리를 굽혀 땅에 있는 돌멩이 몇 개를 재빨리 주웠다. 그리고 궁전의 대문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대문 앞에는 벌써 총을 든 군인 몇 명이 서 있었다.

 태용을 발견한 그들이 총을 들어 올리자 태용은 그 중 한 명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총알같이 날아간 돌멩이에 맞고 그가 쓰러졌다. 그는 몸을 굴려 총알을 피한 뒤 계속 돌멩이를 던져 군인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뒹굴고 있는 군인들 사이를 지나서 궁전의 대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어제 들어온 광장이 나왔다. 태용이 대문을 열고 나오자 깜짝 놀란 문 밖의 경비병들이 권총을 뽑았다. 태용은 광장을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렸다. 그는 살면서 그렇게 빨리 달려본 게 처음이었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랐다. 뒤에서 총알이 스치고 날아왔다.

 태용은 광장 옆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가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경찰차가 나타났다. 경찰차에서 내린 경찰이 그를 향해 총을 쐈다.

 태용은 다시 뒤로 돌아 다른 골목으로 뛰어들어서 정신없이 달렸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몸을 숨길만한 장소가 나올 때까지 계속 달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골목 몇 개를 순식간에 빠져나와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거리 전체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멈춰 섰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도 놀라서 멈춰 섰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멎으면서 거리 전체에서 메아리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왕 폐하를 시해하려던 이태용이 달아났다. 발카르의 모든 국민들은 그를 발견하는 즉시 신고하라. 다시 한 번 말한다. 국왕 폐하를 시해하려던 이태용이 달아났다.”

 태용은 놀란 한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소설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이 나라 전체에 그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몸을 숨겨야 할 것 같았다. 그 때 그의 앞으로 경찰차 두 대가 나타났다. 그는 재빨리 다른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골목 안을 뛰어 가는데 저 앞에 한 남자가 검은 색 차의 운전석에 타려고 하고 있었다. 태용은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밀치고 차 문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는 남자를 무시하고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그가 좁은 도로를 벗어나 큰 도로로 나와 남쪽을 향해 달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 세 대가 따라붙었다.

 “미치겠네. 어떻게 저렇게 빠른 거야?”

 아마 골목에 있는 CCTV로 그가 차량을 탈취한 것을 보고 쫓아온 모양이다. 그는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성인이 된 해에 운전면허를 따기는 했지만 자동차가 없었으니 운전을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얼마 만에 핸들을 잡은 건지 몰랐다. 하지만 망설일 여유도 없었다. 어느새 뒤에서 따라오는 경찰차는 다섯 대로 늘어났다.

 태용은 계속 액셀을 밟았다. 차의 속도가 높아졌다. 그 때 저 앞에서 경찰차 세 대가 나타나 도로를 막아 세웠다. 태용은 깜짝 놀라 갓길로 빠져나갔다. 작은 도로를 빠져나가서 다시 큰 도로에 접어들자 앞쪽 표지판에 서쪽 국경으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찰나의 순간 태용은 고민했다. 어떡하지? 아예 이 나라를 벗어나야 하나? 그는 일단은 그게 가장 안전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핸들을 틀어 국경 방향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신호를 두 번이나 무시하고 빠르게 차를 몰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에 차들이 한적해지고 저 앞에 국경 검문소로 보이는 건물 몇 개가 서 있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태용을 보고 건물에서 누군가가 나왔지만 태용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경적을 마구 울렸다. 그러자 그 사람은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

 태용은 그대로 검문소 옆을 지나쳐 달렸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은 도로가 없는 넓은 평원이었다. 태용은 평원 위로 계속 차를 몰았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달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태용은 뒤를 돌아보고 내뱉었다.

 “아, 진짜!”

 헬리콥터 두 대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헬리콥터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에게 기관총을 퍼부었다. 땅 위로 총알이 빗발치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태용은 속도를 높였지만 결국 차가 총에 맞았다.

 태용은 순간적으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땅 위를 마구 구르다가 발딱 일어났다. 그가 버리고 간 차는 좀 더 달리다가 기관총에 맞고 타이어가 터졌는지 옆으로 반 바퀴 돌더니 뒤집어지고 말았다.

 헬리콥터들은 그를 지나쳐 앞으로 향하다가 방향을 돌려서 다시 그를 향해 날아왔다.

 태용은 뒤집어진 자동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창문이 깨진 차 문짝을 잡고 힘껏 잡아당겨 문짝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뒷좌석 문짝 하나를 더 떼어냈다.

 헬리콥터가 고도를 낮추더니 다시 그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땅 위로 먼지가 튀어 올랐다.

 태용은 오른손에 든 문짝 하나를 앞쪽에 있는 헬리콥터의 운전석을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문짝은 원반처럼 날아가서 헬리콥터의 앞 유리를 깨고 조종사의 몸에 박혔다.

 태용은 다른 문짝 하나를 집어서 다시 두 번째 헬리콥터를 항해 던졌다. 헬리콥터는 몸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그 전에 먼저 문짝이 앞 유리를 박살내버렸다.

 첫 번째 헬리콥터가 태용의 머리 위를 지나 날아가서 땅에 처박혔다. 뒤를 이어 두 번째 헬리콥터도 그 옆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직후 두 대의 헬리콥터는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태용은 재빨리 땅에 엎드렸다. 화염과 함께 파편이 그의 몸 위를 스치고 날아갔다.

 태용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초원 위에 헬리콥터 두 대가 추락해서 불타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총리대신이 곧 또 다른 추적대를 보낼 것이다. 발카르 국경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후스타이 초원은 거대한 넓이로 유명했다. 실제로 태용이 아무리 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발카르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일단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올 때까지 계속 걷기로 마음먹었다.

 태용은 그 날 해가 질 때까지 계속 걷다가 달과 별이 뜬 저녁에도 계속 걸었다. 저녁이 되자 살벌한 추위가 찾아왔다. 태용은 두 팔로 몸을 감싸 쥐고 덜덜 떨면서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다시 해가 뜨고 날이 밝아졌다. 아침을 지나 점심 즈음이 되자 언제 추웠냐는 듯이 급격히 더워졌다. 태용은 헥헥거리면서 계속 걸어갔다.

 다시 추운 밤이 찾아오고, 그 뒤에는 더운 낮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태용은 잠도 자지 않고 계속 걸었다.

 허기와 피로 때문에 점점 견디기 어려워졌다. 태용은 이제 그만 할까 싶어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뒤를 돌아봤지만 끝없이 넓은 평야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방이 마찬가지였다. 그는 몇 차례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방향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태용은 지쳐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이 쏟아졌다.

 ‘자면 안 되는데. 여기서 잠들면 죽고 말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허기와 피로가 너무 심해서 이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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