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슬> 소설 연재
발카르 왕국으로 가는 데는 걸어서 꼬박 하루가 걸렸다. 태용은 황량한 평원 위를 걷다가 밤이 되자 모닥불을 지핀 뒤 두꺼운 옷을 껴입고 그 옆에 누워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 배낭에서 음식을 꺼내 간단한 아침을 먹은 뒤 일어나 다시 남쪽을 향해 걸었다.
그는 점심 무렵 발카르 왕국의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용은 간단한 검문을 받은 뒤 국경을 넘어갔다.
국경지대를 오가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자 작은 도시가 나왔다. 태용은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발카르의 수도인 쿠미크를 향해 달렸다.
쿠미크는 서쪽으로 드넓은 후스타이 초원과 접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국토를 가로지르는 강과 접하고 있었으며 중앙에는 왕궁이 있었다.
태용은 쿠미크 중앙역이 있는 기차역에서 내린 뒤 새로 산 스마트폰으로 궁전의 위치를 검색했다. 마침 이곳에서 궁전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는 다시 버스를 잡아탔다.
버스는 궁전 앞에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태용은 궁전의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거대한 대문 앞에는 경비병 몇 명이 양쪽으로 서 있었고 관광객들이 궁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태용도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런 뒤 경비병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그러자 경비병이 짧게 대답했다.
“안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뭐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몇 년 전에 이 궁전 안으로 커다란 금고 같은 게 들어가지 않았나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다른 경비병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태용은 고맙다고 한 뒤 그곳을 떠났다.
그는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오래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작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한적한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용이 들어오자 흰 머리가 성성한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일어나서 메뉴판을 갖다 줬다. 태용은 발카르 전통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갖다 준 뒤 다시 TV 앞에 앉았다. 태용은 부드러운 양고기를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맛있네요.”
태용의 말에 할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태용은 음식을 다 먹은 뒤 후식으로 발카르 전통 아이스크림과 시원한 차를 주문했다. 할머니가 다시 음식을 가져오자 태용은 지갑 안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 할머니의 손에 쥐어줬다.
“여기 계산이요. 나머지는 팁이에요.”
그러자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식 값의 열 배가 넘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태용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은 뒤 물었다.
“사장님, 이곳에서 가게를 하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40년이 넘었지요.”
“이 가게는 궁전과 가깝잖아요. 그럼 사장님은 궁전으로 사람들이 출입하는 걸 자주 보시겠네요?”
“그렇지요.”
“그럼 혹시 몇 년 전에 군인들이 커다란 상자 같은 걸 갖고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시지 않았나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런 건 잘 모르겠군요.”
“그렇군요. 그럼 발카르 왕이 기계도시에서 커다란 금고를 가져왔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글쎄, 그런 말도 못 들어봤는데.”
태용은 아이스크림을 다시 한 입 떠먹었다.
“그렇군요. 사실 제가 어떤 물건을 찾고 있는데, 그게 아마도 저 궁전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물건을 찾는데요?”
“소설구슬이요.”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뭐지?”
“위대한 소설을 쓰게 해주는 신비한 구슬이에요.”
할머니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태용을 쳐다봤다.
“그런 물건이 있다는 건 내 평생 처음 듣는구려.”
“저도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찾아서 마한에서 여기까지 왔죠.”
“아이고, 멀리서도 왔네.”
“네. 그래서 그걸 꼭 찾아야 해요. 아무래도 제가 저 궁전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할머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젊은이, 그건 불가능해요. 우리 같은 일반 사람은 궁전 안으로 못 들어가.”
“정말요? 관광객한테 개방되지도 않나요?”
“그럼, 저곳의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데.”
“그렇군요.”
태용은 잠시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갈 수 없나요?”
“그야 젊은이가 이 나라에서 출세를 하면 들어갈 수야 있겠지.”
“출세요?”
“그렇지. 고위직 공무원이 돼서 임금님 곁에서 일한다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네요.”
할머니는 태용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태용이 식탁 옆에 기대어 놓은 김용의 칼에 시선이 닿았다. 할머니가 물었다.
“젊은이는 직업이 어떻게 되시오?”
“저요? 저는 뭐...... 편의점 알바생이에요. 작가 지망생이기도 하고요.”
“작가 지망생? 근데 칼을 들고 다니네.”
태용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이래 봬도 무예가 상당하답니다.”
“진짜? 근데 젊은이는 너무 말랐는데. 내 손주 같으면 매일 뭘 먹이고 싶을 것 같아.”
“저 되게 힘세요. 아마 할머니는 저처럼 힘 센 사람을 못 보셨을 걸요?”
할머니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태용을 희한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믿어지지가 않는구려. 그렇게 말랐는데 무예도 상당하고 힘도 세다니. 오랫동안 수련을 한 거요?”
“뭐, 말하자면 그렇죠.”
태용은 그렇게 둘러댔다.
할머니는 태용의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검투사들의 대회로 유명한 걸 아시오?”
“들어만 봤습니다.”
“우리나라는 매년 전국 최고의 검투사를 뽑는 대회를 연다오. 우리 발카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경기지. 그 대회에서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고가 된 검투사에게는 왕이 직접 막대한 보물을 하사하고 왕과 식사를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오.”
그 말에 태용은 찻잔을 든 손을 멈췄다.
“만약 젊은이가 진짜로 힘과 무예가 남다르다면 검투 대회에 참가해보는 건 어떻소? 그래서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젊은이는 궁전에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을 직접 뵐 수 있을 거요. 물론 쉽지 않겠지만.”
태용은 잠시 옆에 놔둔 검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검투 대회에 외국인도 참가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어떻게 참가하는데요?”
“가까운 주민 센터에 가서 등록하면 돼요.”
“주민 센터요?”
“그렇지. 그러다가 나중에 전국구 대회까지 출전하게 되면 대형 검투장에서 싸움을 하게 되지. 나도 우리 가족과 가끔 가서 구경한다오.”
태용은 찻잔을 마저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할머니에게 지폐 한 장을 더 내밀고 가게를 나왔다.
발카르 왕국은 고대부터 검투 대회를 통해 강력한 군사를 양성해왔다. 그러다가 현대에는 그 전통이 스포츠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태용은 할머니의 말에 따라 인근 주민 센터에 가서 검투 대회 참가 신청을 했다. 마침 지금이 대회 참가자를 모집하는 기간이었다. 그는 외국인 참가자 자격으로 신청을 했다. 신청을 마친 뒤 태용은 그 날 근처에 있는 호텔에 투숙했다.
며칠 후 태용은 대회 지역구 예선 대회에 나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그는 버스를 타고 대회가 열리는 검투장으로 향했다.
원형의 검투장은 야구장보다 조금 작고 비슷한 형태였다. 지역 예선전이었기 때문에 관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검투장 곳곳에 설치된 작은 경기장 안에는 사람들이 목검을 들고 서로 겨루고 있었다. 태용은 번호를 받은 뒤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대기실 안은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지만 대부분 덩치가 크거나 한 눈에 봐도 싸움을 잘 할 것 같은 남자들이었다. 아주 드물게 여자도 한 두 명 보이긴 했는데, 그 여자들조차도 태용보다 덩치가 커보였다. 태용은 평생 자신이 키가 작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곳에 들어오자 고릴라 우리에 들어온 새끼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대기실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태용은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는 커피 자판기에서 밀크 커피를 한 잔 뽑은 뒤 구석에 있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어이, 형씨도 대회에 참가하려고 왔어요?”
누군가가 그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살짝 달라붙은 셔츠를 입은 남자였는데, 키는 태용과 비슷했지만 온 몸이 돌처럼 딱딱해 보이는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태용은 잠시 긴장했지만 상대는 근육질의 몸과 달리 눈빛이 선해 보였다.
태용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태용의 옆에 앉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멋지구만! 형씨가 여기서 제일 날랠 것 같은데.”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태용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씨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소?”
“전 마한 사람입니다.”
“이야, 멀리서 오셨네. 설마 이 대회에 참가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요?”
그건 아니었지만 태용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근처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머리의 근육질 남자가 말했다.
“이역만리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구만. 검술은 할 줄 압니까?”
“네.”
“어이구, 목검을 들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민머리의 말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태용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알고 보면 이런 사람이 재야의 고수인 거요.”
“무협지를 너무 많이 보셨구만.”
민머리의 말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솔직히 좀 웃기긴 해서 태용도 같이 웃었다. 옆자리의 서글서글한 남자는 같이 웃으면서 태용의 등을 두드렸다.
“맞아요, 난 무협지를 많이 읽어서 고수를 알아보지. 이 형씨야말로 진짜 조심해야겠네.”
그러면서 그는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태용은 그와 악수를 했다. 곱고 부드러운 태용의 손과 달리 남자의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 투성이였다. 남자도 그걸 느꼈는지 태용의 손을 보며 말했다.
“음, 이런 말 하면 기분이 상하겠지만, 이렇게 예쁜 손은 내 전 여친 이후로 처음 보는군요.”
“제가 전 여친 만큼 아프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용의 차례가 되자 그는 밖으로 나가서 목검 하나를 받았다. 그는 안내를 받고 검투장의 6번 구역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과 처음으로 칼을 댈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했는데, 상대의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까 태용을 놀렸던 민머리였던 것이다.
민머리 역시 태용을 보고 웃었다.
“이런, 이거 첫 판부터 사람 하나 죽이게 생겼군.”
민머리가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작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간 뒤 심판에게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경기 시간은 15분이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15분 동안 싸워서 심판이 승자를 정한다. 그리고 시간이 다 지나기 전이라도 한 쪽이 항복하면 경기는 끝난다.
심판은 설명을 마친 뒤 태용에게 귓속말을 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둬도 됩니다.”
태용이 고개를 젓자 심판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잠시 쳐다보더니 알겠다고 했다.
태용과 민머리는 각자의 자리로 가서 목검을 들고 서로를 겨냥했다. 민머리가 검을 들고 태용을 노려보자 제법 살기가 돌았다.
태용은 검술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자세로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민머리의 자세를 흉내 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의 온 몸의 세포가 본능적으로 상대가 자신보다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심판이 경기의 시작을 외치자 민머리가 그에게 달려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번개 같은 속도였지만, 태용의 눈에는 거북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굼떠 보였다.
민머리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태용은 웃음이 나왔다. 그는 어이없을 정도로 빈틈을 노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용이 아무 곳에나 목검을 갖다 대도 민머리는 쓰러질 것 같았다.
태용은 당연히 민머리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몇 분 동안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검을 내려치려는 민머리의 명치에 목검의 끝을 살짝 갖다 댄 뒤 한쪽 다리를 가볍게 쳤다.
민머리는 검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얼굴이 파래진 채 쌕쌕거리는 소리를 냈다.
심판이 깜짝 놀라 민머리에게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태용은 그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어나려면 10분은 걸릴 거예요.”
심판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용을 올려다봤다. 태용은 인사를 한 뒤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 날 태용은 두 명과 더 싸웠다. 태용은 두 사람 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뜨렸다. 태용이 상대의 몸을 목검으로 살짝 눌렀다 떼자 상대는 모두 축구공처럼 나뒹굴었다.
그렇게 이틀 후 세 번의 경기가 또 있었고, 다시 이틀 후에 세 번의 경기가 있었다. 마지막 날의 마지막 경기에 그가 만난 상대는 놀랍게도 첫째 날에 그에게 말을 걸었던 서글서글한 남자였다.
남자 역시 태용을 보고 크게 놀란 듯했다.
“아니 형씨, 여기까지 온 거요?”
태용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남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형씨는 고수였구만.”
태용은 친절한 남자와 좀 더 오래 상대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경기가 시작되자 검을 휘두르지 않고 피해 다니기만 했다.
남자는 친절한 인상과 달리 검을 잡자 무서울 정도로 돌변했다. 과연 최후의 2인 중 한 명이 될 만한 실력이었다. 아마도 일생을 검술에 매진한 듯한 그는 긴 목검을 나무젓가락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태용을 압박했다.
하지만 태용에게 그는 다른 병아리들보다 조금 사나운 병아리에 불과했다. 태용은 하품을 하며 남자의 검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이제 그만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검을 들어 남자의 검을 한 번 막은 뒤 손목을 쳐서 검을 떨어뜨리고는 다리를 쳐서 남자를 쓰러뜨렸다.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쓰러졌다.
“오늘은 조금 걷기 힘들 겁니다. 얼음찜질을 하세요.”
태용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남자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선생님, 선생님 같은 고수는...... 정말 처음 봅니다.”
남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태용은 고맙다고 했다.
태용은 남자를 작은 경기장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의자에 앉혔다. 남자는 경이롭다는 눈으로 태용을 올려다봤다.
“선생님의 존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태용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태용이라고 해요.”
그리고 덧붙였다.
“소설가 지망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