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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Aug 01. 2024

11화. 세기의 대결

<소설구슬> 소설 연재

 그 날로부터 사흘 후에 태용은 전국구 본선 대회에 나갔다. 그곳은 앞서와 같은 검투장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제 작은 경기장들이 모두 치워지고 하나의 경기만 열리고 있었다.

 검투를 앞두고 검투장에 점점 관중들이 들어찼다. 태용이 있는 대기실 안에서도 밖에서 와글와글한 관중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대기실 안으로 사람이 들어와서 시간이 다 됐다고 말했다. 태용은 커피를 마저 마신 후 옆에 놔둔 김용의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번 경기부터는 진검승부였기 때문에 태용은 혹시라도 사람을 죽이게 될까봐 긴장이 됐다. 그는 사람을 때릴 때 칼날의 옆 부분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검투장은 관중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태용의 상대는 눈빛이 날카롭고 얼굴에 한 줄기 상처가 난 남자였다. 남자는 한 손에 긴 칼을 쥐고 태용을 노려보고 있었다. 심판이 그들을 가까이 데려오자 그는 태용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검투장의 스피커에서 남자의 이름이 호명되자 남자는 한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다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맞서는 검투사는, 마한에서 온 강력한 용사, 이태용!”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그들 중에는 태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만 관중들은 앞으로 펼쳐질 경기에 신이 나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태용은 마지못해 한 손을 들고 인사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곧 있을 검투보다 더 두려웠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태용은 귀를 막고만 싶었다.

 날카로운 눈빛의 남자가 검을 뽑아들고 그에게 걸어왔다. 태용도 김용의 검을 뽑은 뒤 칼집을 땅에 내려놓았다.

 남자는 태용에게서 일곱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칼끝으로 태용을 겨냥했다. 그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태용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순간 남자가 덮쳐왔다. 남자가 칼을 휘두르자 칼에 비친 햇빛이 번쩍 하고 빛났다.

 태용은 김용의 검으로 남자의 검을 막았다. 그러자 남자는 아주 빠르게 태용을 공격하며 밀어붙였다. 태용은 뒷걸음질을 치며 남자의 공격을 막았다.

 “물러서지 마!”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자 태용은 고개를 돌려 관중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며칠 전에 태용과 붙었던 서글서글한 남자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힘내!”

 태용이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남자의 칼이 태용의 머리를 내리쳤다. 태용은 가볍게 칼을 들어 막고 남자를 밀어붙였다.

 그 남자는 태용이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검투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남자의 칼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태용의 빈틈을 공략했다. 태용은 그의 칼을 막으면서도 남자의 실력에 감탄했다.

 ‘진짜 노력을 많이 했나 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의 머리를 칼날의 옆으로 찰싹 때렸다. 그러자 남자는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남자의 머리 위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태용이 살살 때렸는데도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미친 듯이 환호성이 터졌다. 그러더니 관중들은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죽여라! 죽여라!”

 태용은 어떡해야 하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피에 굶주린 관중들은 처형을 원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죽이지 않겠다고 하면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것 같군.’

 태용은 두 손으로 칼을 잡고 일부러 과장되게 휘둘렀다. 물론 그는 남자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칼날의 옆으로 남자의 뺨을 살짝 때렸을 뿐이었다.

 남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핏방울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태용은 재빨리 칼을 들어 얼굴에 튀는 핏방울을 막았다.

 남자가 쓰러지자 검투장은 광기의 환호가 터졌다. 관중들은 큰 소리로 태용의 이름을 외쳤다.

 태용은 빨리 대기실로 들어가 숨고 싶었지만 적당히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칼을 높이 들고 용감한 척을 했다. 관중들은 그 모습에 더욱 소리를 질러댔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태용은 두 번의 대결을 더 치러야 했다. 물론 두 번 다 태용은 가볍게 이겼다. 그에게 대결보다 어려웠던 것은 잔인한 볼거리를 기대하는 관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상대방과 얼마나 오랫동안 놀아줄지 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대 검투사와 열심히 싸우는 척 하다가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면 상대의 급소를 살짝 때려 기절시켰다.

 이제 어느덧 태용은 마지막 대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전국구 결승에 진출하게 되자 태용은 발카르 왕실이 마련해준 호화로운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거대한 호텔 스위트룸을 혼자 썼다. 이 스위트룸은 발카르 최고의 검투사들에게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잠깐 동안 제공되는 천국이었다.

 태용은 매 끼니마다 산해진미를 먹으며 자신이 한 때 해적들의 노예로 잡혀 있던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나한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

 태용은 그 날 식사를 한 후 호텔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좀 하다가 수영장의 긴 선 베드에 누워서 칵테일을 홀짝이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는 눈을 감고 최후의 검투에서 이긴 후 왕을 만난 후에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

 그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태용 씨 맞죠?”

 태용은 고개를 들고 상대를 쳐다봤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한 손에 칵테일 잔을 들고 서 있었다.

 태용은 본능적으로 남자가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녔음을 느끼며 일어나 앉았다.

 “네, 누구시죠?”

 남자가 옆에 있는 선 베드에 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전 묵탄이라고 합니다.”

 태용이 말없이 남자의 손을 잡자 남자가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전년도 검투 대회 우승자입니다.”

 그 말에 태용은 깜짝 놀랐다.

 “진짜요?”

 “그리고 당신의 경쟁자이기도 하죠.”

 태용은 더욱 놀랐다.

 “아, 그러면 내일 저랑 싸울 상대가 바로 선생님이군요.”

 “그렇습니다.”

 태용은 입을 벌린 채 남자를 훑어봤다. 그는 태용과 비슷한 나이거나 한두 살 정도 더 많아 보였지만 그의 몸은 태용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태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가 한 손가락으로 태용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신이 얼마나 뛰어난 무사인지 직접 봤습니다.”

 그는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태용은 그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묵탄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용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영광이에요.”

 묵탄은 태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언제부터 무술을 연마하셨습니까?”

 태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요.”

 묵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평생 검술을 연마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싸울 때마다 그 싸움이 제 인생의 마지막 대결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당신도 그러겠죠?”

 태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인생의 모든 싸움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내일의 대결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할 것 같군요.”

 “왜요?”

 “당신을 만났으니까요.”

 “아......”

 묵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태용이 민망한 기분이 들 때까지 그렇게 태용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태용은 그가 자신의 눈 너머의 뇌까지 꿰뚫어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한참 동안 태용을 바라보던 묵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기하군요. 당신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무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토록 강력한 무공을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감추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태용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당신은 마치, 뭐랄까....... 무사보다는 소설가나 시인 같은 직업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맞아요. 전 소설가 지망생이에요.”

 “네?”

 묵탄이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태용은 재빨리 덧붙였다.

 “어렸을 때 꿈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지금도 소설을 읽거나 쓰는 걸 좋아하고요.”

 묵탄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고상한 취미로군요.”

 “취미는 아니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태용은 그와 대화하는 것이 불편해졌다. 묵탄도 그것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계신대 제가 실례한 것 같군요. 그럼 마저 쉬시죠.”

 그가 지나가자 태용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묵탄은 걸어가다가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말했다.

 “제가 당신을 이길 겁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태용은 그가 사라진 쪽을 한동안 쳐다봤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호텔 앞에는 태용을 데리러 온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태용은 아침을 먹은 후 차를 타고 쿠미크에서 가장 큰 원형 검투장으로 향했다.

 검투장은 이미 관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태용이 있는 대기실에서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군.’

 그는 검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생각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니까 마무리를 잘해보자고.’

 태용은 검을 살짝 뽑았다. 칼날에 긴장한 자신의 표정이 비치고 있었다. 물론 그는 묵탄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상대방보다 월등한 무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목숨을 건 대결을 하는 것은 긴장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가 칼을 다시 칼집에 넣는데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용은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가 경기장으로 향하는 어두운 통로를 걸어가고 있을 때 경기장의 스피커에서 묵탄을 소개하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관중이 크게 환호했다. 작년 대회의 우승자인 묵탄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사람은!”

 태용이 소개되었다. 태용은 어두운 통로를 지나 경기장으로 나왔다.

 관중의 함성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태용은 귀가 먹먹했다.

 그는 묵탄을 향해 걸어갔다. 묵탄 역시 태용을 향해 걸어왔다. 두 사람은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묵탄은 호텔 수영장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태용은 감정이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며 파충류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 사람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베고 죽였을까.’

 열 발자국이나 떨어져 있었음에도 태용은 묵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묵탄은 지금 단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태용을 죽일 수 있을지. 태용은 어쩌면 묵탄을 기절시키는 게 아니라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을 정말 죽여야 할까?’

 하지만 그 순간 소설구슬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간절히 원하던 무한히 위대한 소설도 떠올랐다. 태용은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태용의 마음을 읽었는지 묵탄 역시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 때 스피커에서 해설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드디어 올해 검투사 대회의 마지막 경기가 펼쳐집니다!”

 경기장 전체가 함성으로 들썩거렸다. 태용은 귀를 막고 싶었다.

 해설자의 말이 계속되었다.

 “여러분은 묵탄과 이태용, 두 용사의 대결을 기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올해 최종 경기의 규칙은 국왕 폐하의 제안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두 용사의 싸움보다 더 짜릿한 경기를 보게 될 겁니다!”

 무슨 말이지? 태용은 어리둥절했다. 묵탄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두 용사는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한 팀을 이뤄 싸우게 됩니다. 그럼 지금, 두 용사가 싸워야 할 상대를 공개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경기장 맞은편의 철창문이 천천히 열렸다. 잠시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어두운 통로 안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태용은 온 몸의 촉각이 곤두섰다.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검투사의 모습이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태용은 그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태용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자신이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난 절대무공을 가졌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운 거야? 이 세상에 나보다 더 강한 상대가 있다고? 김용의 무공을 가진 나보다?

 그의 본능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상대는 너무 위험하다. 이 자에 비하면 그의 옆에 있는 묵탄은 갓난아기와 같았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지? 이 세상에 이렇게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태용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태용은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뿜는 콧김마저 느낄 수 있었다.

 맙소사, 저건 사람이 아니잖아.

 “신사숙녀 여러분, 로키입니다!”

 경기장 밖으로 나온 것은 거대한 흑갈색 곰이었다.

 잠시 경기장 안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이내 폭탄이 터진 것처럼 환호성이 터졌다. 관중들은 곰이 사람을 둘이나 찢어발기는 모습을 곧 보리라는 기대에 신이 났던 것이다.

 태용은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옆을 보니 묵탄 역시 경악한 표정이었다. 그의 파충류 같은 무표정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태용은 지금 자신의 표정도 그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곰은 휘적거리며 두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로키는 실로 거대한 크기였다. 태용은 곰이란 동물이 이렇게 큰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곰의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태용은 저들이 이 경기를 위해 일부러 곰을 굶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곰은 묵탄과 태용 중에서 누구를 먼저 잡아먹을지 재고 있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요!”

 갑자기 묵탄이 소리를 질렀다.

 “이건 사기입니다! 난 이 경기를 하지 않겠소!”

 묵탄은 그렇게 외치며 칼을 든 손을 공중에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관중의 고함에 묻혔다.

 곰이 서서히 다가왔다. 태용은 그 거대한 몸뚱이 안에 들어찬 근육이 꿈틀거리며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곰은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덮칠 수 있었다.

 묵탄이 태용에게 다가왔다.

 “이태용 씨, 당장 경기를 멈춰야 합니다.”

 태용은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묵탄은 곰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옆으로 걸으며 경기장의 입구로 다가갔다. 태용도 그를 따라갔다.

 그 때였다.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곰이 달려들었다.

 태용은 깜짝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곰은 그 거대한 몸집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달려왔다.

 묵탄과 태용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자 곰은 방향을 틀어 묵탄을 쫓아갔다.

 태용이 뛰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곰이 묵탄을 덮치고 있었다. 묵탄이 칼을 뽑아 곰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묵탄의 몸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관중이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그들이 보고 싶어 하던 광경이 나온 것이다.

 곰이 묵탄을 물고 몇 번 흔들자 묵탄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몇 초 더 지나자 묵탄의 몸뚱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찢겨졌다.

 태용은 구역질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로키는 맛있게 고기를 먹고 있었다. 태용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그는 곰이 묵탄을 먹고 배가 불러서 자신을 공격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어쩌면 이대로 경기가 끝날지도 몰라. 묵탄이 죽고 내가 살아남았잖아. 곰도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제 경기는 끝나겠지.’

 곰은 시체에 입을 묻고 열심히 먹고 있었다. 태용은 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계속 뒷걸음질쳤다.

 그런데 그 순간 곰이 고개를 돌렸다. 태용은 곰과 눈이 마주쳤다.

 곰이 물고 있던 고기를 뱉더니 태용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어떡하지?’

 관중들의 환호성이 더 커졌다. 그들은 곰이 밥을 먹는 장면보다 살아있는 사람을 찢어발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태용은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죽은 척 하면 곰이 사람을 먹지 않고 지나간다는 말이 있던데, 땅에 엎드려서 죽은 척 할까? 하지만 굶주리고 피에 자극받은 곰이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중들은 곰이 사람을 찢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발카르인들은 곰이 죽은 척하는 태용을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싸워야 한다. 태용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저 놈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로키가 점점 가까워졌다. 태용은 곰의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이제 곧 내 피도 저기에 묻히겠지.

 태용은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침착해야 돼. 그는 김용의 검을 뽑은 뒤 칼집을 땅에 내려놓았다. 침착해야 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곰이 그에게 점점 더 빠르게 다가왔다. 태용은 제자리에 서서 두 손으로 칼을 잡고 곰을 겨냥했다.

 관중의 환호가 더 커졌다. 그들은 이 상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거대한 곰에 맞서 칼을 든 연약한 태용의 모습이 그들의 흥분에 불을 질렀다. 관중이 태용의 이름을 외쳤다.

 곰은 태용에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태용이 도망가지 않고 버티고 서 있자 로키 역시 조금 긴장한 듯했다.

 태용은 마른침을 삼키며 곰의 거대한 발을 응시했다. 곰의 발끝에 달린 긴 발톱에 눈길이 닿자 소름이 끼쳤다. 그 발톱은 태용의 피를 원하고 있었다.

 침착해야 돼. 놈이 휘두르는 발에 한 대만 스쳐도 내 몸뚱이가 갈라질 거야. 최대한 피해 다니다가 놈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그 순간 곰이 달려들었다. 어마어마한 몸뚱이가 번개처럼 날아왔다.

 태용은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곰의 이빨이 허공을 물었다.

 곰이 벌떡 일어나 포효를 했다. 두 발로 일어선 곰은 태용보다 키가 두 배는 커 보였다. 일어선 곰이 그대로 몸을 날려 태용을 덮쳤다. 태용은 다시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곰의 앞발이 그의 뺨으로 날아왔다. 태용은 고개를 숙여 피했다. 머리 위로 휙 하고 바람이 불었다. 다른 쪽 앞발이 다시 날아오자 태용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피했다.

 곰이 입을 활짝 벌리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태용은 뛰어올라 곰의 등을 밟고 곰을 건너뛰었다. 태용이 곰의 공격을 피할 때마다 경기장이 터질 것처럼 환호성이 터졌다.

 곰이 다시 뒤로 돌아서 달려왔다. 곰은 이제 잔뜩 약이 오른 상태였다.

 거대한 몸뚱이가 달려오는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태용이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어느새 곰의 입이 태용을 덮쳤다. 태용은 옆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곰의 앞발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태용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굴렸다. 앞발이 그의 허리를 가르려 하자 태용은 허리를 틀어 허공을 뛰어넘었다. 그 순간 곰의 다른 쪽 앞발이 태용의 몸에 걸렸다.

 태용이 몸을 비트는 순간 곰의 발톱이 태용의 옷을 찢어버렸다. 태용은 땅에 착지한 뒤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셔츠가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옷이 찢어진 방향을 따라 몸에도 긴 핏자국이 지나고 있었다. 내 피인가? 핏자국을 만져보자 따가웠다. 내 상처네.

 태용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곰이 그에게 뛰어들었다. 태용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앞발이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태용은 칼을 휘둘러 앞발을 자르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곰이 더 빨랐다. 다른 쪽 앞발이 태용의 검을 쳐버렸던 것이다.

 검이 경기장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태용은 깜짝 놀라 오른쪽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는 곰 역시 두 발로 선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곰이 해를 등지고 있어서 거대한 그림자가 태용을 집어삼켰다.

 태용은 곰의 뒤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칼을 힐끗 쳐다봤다. 칼을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 곰이 선 채로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칼 쪽으로 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태용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깊이 내뱉었다. 그리고 두 주먹을 꽉 쥐고 들어올렸다.

 “좋아, 맨손으로 붙어보자고.”

 그 말에 호응하듯 곰이 달려들었다.

 곰의 앞발이 그의 머리를 날아왔다. 스치기만 해도 목이 날아갈 것이다. 태용은 고개를 숙여 피했다. 그런 뒤 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곰의 머리가 뒤로 휙 꺾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태용은 다른 주먹을 꽂았다. 곰이 잠시 휘청거리더니 다시 중심을 잡았다. 태용이 때리려고 했지만 곰이 더 빨랐다. 곰의 앞발이 날아오자 그는 허리를 뒤로 꺾어 피한 뒤 다시 튕기듯 일어나 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도 제대로 맞았다. 곰의 머리가 옆으로 꺾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태용은 곰의 얼굴에 한 번 더 주먹을 꽂아 넣었다.

 로키가 옆으로 굴러 넘어지더니 다시 일어났다. 곰은 충격이 꽤 큰지 고개를 흔들었다.

 관중은 이제 미쳐 날뛰고 있었다. 함성이 경기장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로키는 얼굴을 몇 번 더 흔들더니 태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곰은 태용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는지 전보다는 조심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태용은 그렇기 때문에 곰이 더욱 자신을 찢어발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곰은 태용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태용은 주먹을 들어 올린 채 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너도 불쌍한 놈인 것 같다.”

 태용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곰의 눈이 깜박였다.

 “하지만 너한테 져줄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덤벼, 새끼야.”

 곰이 덤벼들었다.

 태용은 옆으로 피한 뒤 재빨리 자세를 잡고 곰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묵직한 통나무를 때리는 것 같았다. 곰이 비틀거리자 태용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곰의 머리에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주먹을 꽂아 넣었다. 두 번 다 유효타였다. 곰이 앞을 보지도 않고 발을 휘둘렀다. 태용은 뛰어올라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땅으로 떨어지면서 주먹으로 곰의 이마를 찍어 내렸다. 곰의 이빨 몇 개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곰은 온 몸을 날렸다. 하마터면 태용은 곰에게 깔릴 뻔했다. 태용이 옆으로 굴러 피하자 곰이 다시 그를 덮쳤다. 그 순간 태용은 곰의 아래로 숙이면서 곰이 뛰어 들어오는 힘을 그대로 넘겨 곰을 엎어 메쳤다.

 거대한 몸뚱이가 앞으로 굴러갔다. 태용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 곰의 가슴을 힘껏 걷어찼다. 역시 딱딱한 바위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곰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곰이 뒤로 넘어지려 하자 태용은 곰의 다리를 걷어찼다. 곰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휘두르는 앞발을 태용은 옆으로 피하면서 두 팔로 힘껏 뼈를 부러뜨렸다.

 곰이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일어나자마자 태용은 주먹을 날렸다. 왼쪽에 한 번, 오른쪽에 한 번, 그리고 다시 오른쪽에 한 번을 꽂아 넣자 곰의 두개골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태용은 그대로 뛰어올라 허공에서 체중을 실어서 주먹으로 곰의 머리를 내리쳤다.

 곰의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태용이 땅에 착지한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곰이 신음하면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로키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태용은 오른쪽 주먹에 내공을 싣고 로키의 머리에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거대한 곰의 뒷발이 잠시 허공에 뜨더니 로키는 배를 내밀고 뒤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로키는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경기장이 터질 것처럼 환성이 쏟아졌다. 태용은 기진맥진해서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태용은 주먹을 높이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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