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슬> 소설 연재
다음 날 태용은 늦잠을 잤다. 그가 한참 잠에 빠져 있었는데 이루진이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와 그를 마구 흔들었다.
“태용이 형! 큰일 났어요!”
태용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물었다.
“이루진, 무슨 일이야?”
“오르혼 부족이 오고 있어요! 빨리 피해야 해요!”
그 말에 태용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르혼 부족은 호라진의 부모를 죽인 부족이었다. 그들은 자주 키야드 부족을 습격해서 가축과 재물을 약탈했다. 그러다가 한동안은 잠잠하다 싶었는데 다시 습격한 것이다.
태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며 물었다.
“누나는 지금 어디 있어?”
“부족 사람들을 모아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누나가 아이와 노인들은 언덕 뒤로 넘어가서 피하래요. 빨리 움직여요!”
태용이 천막 밖으로 나가자 총과 활을 든 사람들이 소리치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말도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목동 몇 명이 이미 양떼를 몰고 노인과 아이들과 함께 언덕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태용은 뛰어다니는 말과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호라진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용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호라진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소총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태용 씨, 오르혼 부족이 오고 있어요. 곧 싸움이 시작될 거예요. 어서 이루진과 함께 피하세요.”
“저도 함께 싸울게요.”
“네?”
“저한테도 무기를 주세요. 저도 싸울게요.”
호라진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저쪽에 있는 천막에 가서 무기를 받으세요.”
태용은 호라진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한 노인이 사람들에게 총과 활을 나눠주고 있었다. 태용이 노인에게 말했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무기를 주십시오.”
그러자 노인은 눈을 치켜뜨고 태용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자네는 너무 유약하네. 싸우지 말고 몸을 피하게나.”
“제가 이 부족 전체에서 가장 강한 전사에요. 저에게 무기를 주세요.”
태용이 노인의 팔을 잡고 흔들자, 노인은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젊은이에게 무기 배급을 맡긴 뒤 그를 천막 안으로 데려갔다.
“자, 이 칼을 쓰게나.”
태용은 노인이 내민 칼을 받았다. 그는 발카르 궁전에서 도망칠 때 김용의 검을 그곳에 놓고 왔던 것이다. 태용은 노인이 준 칼을 한 번 휘둘러 본 뒤 말했다.
“이건 너무 가볍고 약합니다. 더 무겁고 튼튼한 거 없나요?”
“더 무거운 거?”
“네. 키야드 부족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무거운 칼을 주세요.”
노인은 잠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태용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재촉하자 알았다면서 천막 안의 물건들 사이에서 커다란 궤짝 하나를 찾아냈다. 태용은 낑낑거리는 노인 곁으로 다가가 궤짝을 번쩍 들어 올려 밖으로 꺼낸 뒤 뚜껑을 열었다.
궤짝 안에는 길고 커다란 칼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태용은 칼을 집어 칼집에서 뽑았다. 김용의 검보다는 가벼웠지만 그래도 제법 칼날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호라진 부족장님의 아버지가 쓰셨던 칼이네.”
노인이 말했다.
“너무 무거워서 다른 전사들은 쓰지 못했지. 이게 우리 부족이 가진 칼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일세.”
태용은 칼을 칼집에 넣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네요. 이걸 쓰겠습니다.”
그는 칼을 들고 소총 한 자루를 등에 멘 뒤 천막 밖으로 뛰어나왔다. 어느새 천막촌은 사람들이 떠나서 조용해진 상태였다. 저 멀리 말을 탄 키야드 전사들이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태용이 그들을 쫓아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태용이 형! 태용이 형!”
뒤를 돌아보니 이루진이 달려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디 있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빨리 따라오세요, 피해야 해요.”
“이루진, 난 싸우러 갈 거야.”
“네? 뭐라고요?”
“키야드 부족이 나를 구해줬잖아. 이제는 내가 이 부족을 구할 차례야. 난 싸우러 갈게. 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언덕 뒤에 숨어 있어.”
이루진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이에요? 형이 어떻게 싸운다는 거예요?”
“말했잖아, 난 맨손으로 곰을 때려잡은 사람이야. 내가 있어야 키야드 부족이 이길 수 있어.”
“안 돼요, 가지 마요.”
이루진이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제발 가지 마요! 제발요.”
태용은 허리를 굽혀 이루진과 눈을 맞췄다.
“이루진, 내가 꼭 누나를 지켜줄게. 누나랑 같이 무사히 돌아올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그는 뒤에 서 있던 노인에게 외쳤다.
“어르신, 이루진을 데리고 가주세요.”
그러자 노인이 옆에 있던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이걸 타고 가게.”
“감사합니다. 이루진을 부탁드립니다.”
노인이 이루진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루진은 노인을 뿌리치고 태용에게 매달렸다.
“가지 마요, 제발. 가지 마세요......”
이루진이 그에게 매달려 흐느꼈다. 태용도 눈물이 고였다.
“이루진, 나는 무사히 돌아온다니까. 걱정하지 마. 넌 초원을 통일할 영웅이잖아. 이 정도로 울면 안 되지. 가서 용감하게 기다리고 있어. 반드시 돌아올게.”
태용은 훌쩍이는 이루진의 눈물을 닦아준 뒤 말 위에 올랐다. 그는 말을 몰고 앞서가는 키야드 전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태용이 키야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 때는 넓은 초원 위에 두 군대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태용은 말을 몰고 키야드 전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잠깐만 비켜주세요.”
그는 호라진이 어디 있나 찾다가 그녀가 맨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라진은 칼을 찬 채 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었다.
“호라진!”
태용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호라진이 그를 보고 미소 지었다.
“태용 씨, 왔군요.”
“지금 어떤 상황이죠?”
“곧 전투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저 앞에 오르혼 군대가 길게 일자진을 펼치고 서 있었다. 한 눈에 봐도 키야드 군대와 비슷한 규모였다.
태용은 말고삐를 꽉 잡고 마른 침을 삼켰다. 검투장에서 칼싸움을 여러 번 해보긴 했지만, 이런 대규모 전투는 처음이었다.
‘아마 양측 모두 많은 군사들이 죽을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있는 호라진을 쳐다봤다. 호라진 역시 긴장으로 딱딱해진 얼굴로 오르혼 군대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 때 오르혼 군대 쪽에서 말을 탄 병사 한 명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키야드 전사들이 총으로 그를 겨냥했다.
말에 탄 오르혼 병사가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도달해 말을 세우더니 외쳤다.
“우리 부족장님이 일대일 결투로 결판을 내길 원하신다. 너희들 중 한 명의 전사가 우리 쪽 전사와 싸우는 거다.”
그러자 호라진이 외쳤다.
“우리가 이기면 너희가 물러간다는 거냐?”
“그렇다. 하지만 너희가 진다면 항복해야 한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호라진은 굳은 얼굴로 오르혼 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태용은 호라진과 오르혼 군대를 번갈아 보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싸울게요.”
그러자 호라진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무슨 말이에요?”
“제가 싸우겠다고요. 저를 보내주세요.”
호라진이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보자 태용은 말을 이었다.
“제가 키야드 전체에서 가장 강한 전사에요. 저는 곰을 맨손으로 이긴 적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키야드 부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가 가야 해요.”
“태용 씨, 지금 이건.......”
“이걸 보세요.”
태용은 들고 있던 칼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호라진이 놀라서 말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의 칼이잖아요.”
“맞아요, 제가 이걸로 결투에서 이기고 올게요.”
“하지만 그 칼은 너무 무거운데......”
“저한테는 아니에요! 전 이걸 아주 가볍게 쓸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절 보내주세요. 제가 반드시 이기고 올게요.”
태용을 보는 호라진의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오르혼 병사를 향해 외쳤다.
“결투를 받아들인다.”
그러자 오르혼 병사는 말을 돌려 돌아갔다.
병사가 말을 몰고 가자 호라진이 태용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자신 있어요?”
“당연하죠! 저만 믿어요.”
태용은 말에서 뛰어내린 뒤 오르혼 군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 때 호라진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태용은 뒤를 돌아봤다.
“반드시 이기고 와요.”
태용은 씩 웃어보였다.
“걱정은.”
그리고 그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태용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오르혼 군대 쪽에서도 한 사람이 말에서 내려 그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태용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그를 보고 상대가 엄청난 거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태용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키가 큰 사내였다. 그의 몸집이 어찌나 큰지, 태용은 저 남자도 맨 손으로 곰을 때려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한 손에 태용의 몸보다 더 큰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는 태용에게 걸어오면서 그 거대한 도끼를 한 손으로 쥐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태용도 걸어가면서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그는 오른손에 칼을 쥐고 거인을 향해 달려갔다.
거인도 그에게 달려왔다. 거인은 그 거대한 덩치로 믿기지 않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인이 달려오면서 고함을 질렀다. 태용은 검투장에서 곰이 지르던 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거인이 도끼를 들어올렸다.
평원 한가운데에서, 태용과 거인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거인의 도끼가 그를 베기 전에 태용은 가볍게 허리를 숙여 피했다. 그리고는 긴 칼을 휘둘러 단칼에 거인의 목을 잘랐다.
태용이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거인이 쓰러진 뒤였다. 태용은 뒤로 걸어가서 거인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통을 들어올렸다. 잘린 목에서 피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으, 진짜 끔찍하네.”
태용은 자기 손에 들린 머리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의 머리를 오르혼 군대를 향해 힘껏 던졌다.
허공에 피를 흩뿌리면서 머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아주 멀리 날아간 머리는 오르혼 군대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초원에는 잠시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태용은 그 자리에 서서 오르혼 군대 전체에 공포가 번지는 모습을 잠시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