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슬> 소설 연재
이로써 수천 년 동안 분열되었던 초원은 칼 한 자루 아래에 통합되었다. 그 역사적인 날, 호라진은 초원의 민족은 다시는 분열되지 않으리라 선언했다. 후스타이 제국이 건국되는 순간이었다.
후스타이 제국의 건국 이후 일어난 일들을 여기에 다 적기에는 분량이 부족하기도 하고, 이 이야기와 큰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기서 확실히 말해둘 수 있는 것은, 비록 하노르부직이 성공하긴 했지만 수십 개의 부족이 한 순간에 완벽하게 통일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혼란이 일어났고 때로는 유혈 사태도 몇 차례 일어났다. 하지만 그 모든 혼란의 와중에도,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호라진은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초원 위의 대제국은 단일 제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춰갔다. 그리고 황제는 유목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 노력은 결국 꽃을 피우게 되어 나중에 후스타이 제국은 주변의 다른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이 될 때까지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데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니 여기서는 후스타이 제국이 건국되고 안정되는 과정을 이 정도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하노르부직이 끝난 직후 새로운 국가의 선포식과 황제의 즉위식이 간소하게 치러졌다. 호라진은 태용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태용은 한사코 거절했다.
“난 예나 지금이나 작가 지망생이에요.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세운 제국이잖아요.”
그러자 태용은 자신의 손을 잡은 호라진의 손은 감싸며 말했다.
“당신을 위해 세운 제국이죠. 호라진, 당신이 단독 황제가 되세요. 난 왕이나 황제 같은 건 생각도 해 본 적 없고 생각하기도 싫어요. 그런 것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들은 밤새도록 서로를 설득했지만, 결국 호라진이 태용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호라진은 후스타이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호라진은 태용에게 태왕(太王)이라는 특별한 작위를 내렸다. 지위로 따지면 후스타이 제국의 2인자라 할 수 있었다.
호라진은 즉위한 즉시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해야 했다. 호라진이 너무 바빠서 태용은 그녀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호라진은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태용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하노르부직이 끝나고 사흘 후 아침, 호라진은 황제의 천막으로 태용을 불렀다.
옥좌에 앉은 호라진은 비단으로 만든 용포를 입고 있었다. 태용이 들어오자 호라진은 옥좌에서 일어나 태용의 손을 잡고 탁자에 앉았다.
“당신 덕분에 우리 유목 민족이 나라를 갖게 됐어요. 당신이 만든 제국이에요.”
“황제 폐하, 별 말씀을.”
태용은 웃었지만 그녀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초원이 수천 년 동안 꿈꾸던 일을 당신이 해낸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걸 바칠게요.”
호라진은 가까이 다가앉아 태용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주변 국가들에게 제국의 건국을 알리고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절단을 보낼 거예요. 그 중 발카르 왕국으로 가는 사절단을 당신이 이끌고 가세요. 가서 당신이 후스타이 제국의 태왕이 되었음을 당당하게 말하고, 그들이 훼손한 당신의 명예를 회복시키라고 하세요. 그리고 소설구슬을 달라고 하세요.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이렇게 해서 태용은 몇 달 전에 도망쳤던 발카르 왕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수백 명의 사신을 이끌고 말을 탄 채 동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일주일 동안 초원을 지나서 발카르 왕국의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을 지나면 곧장 왕국의 수도인 쿠미크가 나왔다.
태용 일행은 곧바로 발카르 궁전으로 안내받았다. 태용은 수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광장을 지나 궁전의 대문에 도달했다. 몇 달 전에 태용이 도망쳐 나왔던 그 대문이었다.
태용은 대문을 지나서 넓은 정원을 지나 궁전의 본관 앞에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환영 만찬이 준비된 만찬장으로 안내받았다.
발카르 왕은 만찬장의 입구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용을 본 왕은 긴장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태왕 전하, 어서 오십시오.”
왕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태용은 그와 악수를 했다.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왕은 태용을 만찬장의 상석에 앉힌 뒤 그 옆에 앉았다. 그들이 국가 정상끼리 나누는 인사와 덕담을 주고받는 동안 전채 요리가 나왔다. 태용은 빵을 한 입 먹으며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 폐하와 식사를 할 때도 이렇게 훌륭한 요리가 나왔었죠. 그 때 베풀어주신 폐하의 호의에 여전히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조금 유감입니다만.”
그러자 왕의 얼굴에 난처한 미소가 번졌다.
“전하, 몇 달 전 일은 제가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우리 총리대신과 전하 사이에 큰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오해는 아니었죠.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까요. 전 그저 제가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벗고 제 명예를 회복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 물론이죠. 그 문제는 이미 완전히 해결됐습니다. 다시 한 번 정말 사과드립니다.”
본격적인 식사가 나왔다. 태용은 나이프로 고기를 썰면서 말했다.
“그럼 저도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죠?”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소설구슬이 들어있는 금고 말입니다. 제가 곰과 싸워서 이긴 대가로 폐하께서는 보물 대신 그 금고를 저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기억하고 계시겠죠? 폐하께서 저에게 금고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후 총리대신이 저를 불렀고, 그 자리에서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총리대신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에 그 사람이 안 보이는군요.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왕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불안해졌다.
“총리대신은 몸이 안 좋아서 집에 있습니다. 그 역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서 직접 전하에게 사죄하려 했으나, 몸이 워낙에 좋지 않아서......”
“그럼 식사 후에 제가 그의 집으로 가겠습니다. 중요한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담판을 지어야죠.”
“그렇게 서두르실 필요는...... 어떻게 전하께서 번거롭게 그의 집까지 가시려고 하십니까. 총리대신을 며칠 안에 최대한 빨리 궁으로 부르겠습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전하께서는 그동안 궁전에서 편안히 여독을 푸십시오.”
태용은 자신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두를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왕은 초조함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태용은 왕의 태도를 보면서 어쩌면 이 나라에서는 총리대신이 왕보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발카르 궁전에서는 후스타이 제국의 건국과 태용 일행을 환영하는 연회가 종일 열렸다.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태용은 한밤중에야 자신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태용이 방에 들어온 직후 궁전 직원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직원은 칼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폐하께서 전하가 이전에 궁에 두고 가신 검을 돌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김용의 검이었다. 태용은 반가워하며 검을 받아들었다.
직원이 나간 후 그는 칼집을 살펴봤다. 칼은 상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 태용은 칼을 뽑아 칼날도 살펴봤다. 칼날은 예전처럼 거울처럼 매끈했다. 태용은 칼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 칼 한 자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과거에 이 칼은 김용이 무림을 통일하게 해줬고, 이제는 태용이 초원을 통일하게 해줬다. 인류사에 이처럼 중요한 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태용은 생각했다.
태용은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 침대 옆에 놓은 후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누웠다.
‘소설구슬을 찾아서 떠난 모험이 여기까지 이르렀구나. 글을 안 쓴 지 너무 오래 되었어. 이제는 정말로 소설구슬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빨리 다시 소설을 쓰고 싶은데. 이번에는 진짜 작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을 자던 태용은 한밤중에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몸을 날려 총알을 피했다.
총알이 날아와 그가 누웠던 자리를 꿰뚫었다. 태용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둔 검을 뽑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총을 쏘고 있었다. 소음기가 달린 권총이었다.
그 사람이 다시 총을 쏘자 태용은 칼로 총알을 막았다. 총알이 칼에 맞고 튕겨 나갔다. 총알이 쉬지 않고 날아왔지만 그는 전부 칼로 막아냈다. 그의 칼이 총알보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보다는 빨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총구가 향하는 방향과 상대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을 포착해서 계속해서 칼로 총알을 막아냈다.
총알이 다 떨어졌는지 그 사람은 권총을 던지고 방문을 뛰쳐나갔다. 태용은 칼을 든 채 그를 쫓아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력한 충격으로 뒤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이 방문 밖에서 알 수 없는 무기를 쏜 것이다. 굉음과 함께 방문이 산산조각 났고 태용 역시 방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태용은 비틀거리며 칼을 잡고 일어났다.
그 사람이 커다란 소총처럼 생긴 무언가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달빛이 들어와 그를 비췄다. 온몸을 두른 회색 옷과 검은 가면. 총리대신이었다.
총리대신이 태용을 향해 다시 그 무기를 쏘는 순간 태용은 몸을 날려 피했다. 충격파가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태용은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물건에 맞은 총리대신은 무기를 놓치고 넘어졌다.
태용이 그에게 달려들자 총리대신은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빠져나가더니 복도를 쏜살같이 뛰어갔다. 태용도 그를 쫓아갔다.
총리대신은 복도 아래에 있는 계단으로 향하지 않고 유리창이 있는 복도 끝으로 달려가더니 그대로 유리를 박차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태용이 깨진 유리창 앞에 도달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총리대신은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어깨에서 날개 같은 것이 펼쳐지더니 날아가기 시작했다.
태용은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그를 끝까지 쫓아가기 위해 자신도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칼로 궁전 벽을 찍으면서 한 단계씩 아래로 뛰어내리다가 땅에 착지했다.
총리대신은 정원 위를 한 바퀴 돌더니 대문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잠시 태용을 비웃듯이 내려다보더니 다시 날개를 펴고 허공으로 뛰어내렸다.
마침 태용이 떨어진 곳은 정원 옆에 있는 마구간이었다. 태용은 마구간으로 달려가 자신의 말 위에 올라 탄 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말을 몰고 쏜살같이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와 광장으로 나왔다.
총리대신은 이미 저 멀리 하늘에서 날아가고 있었다. 태용은 전속력으로 그를 쫓아갔다.
총리대신은 박쥐처럼 생긴 커다란 날개를 펼친 채 밤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가 날아가는 속도가 빨랐지만 태용의 말 역시 명마였다. 태용은 조금씩 그를 따라잡았다.
한참을 날아가던 총리대신은 방향을 조금씩 서쪽으로 틀면서 속도를 내더니 갑자기 땅을 향해 낙하했다. 그곳은 어느 대저택의 정원이었다. 태용은 저택 앞에 말을 세우고 말에서 내린 뒤 저택의 높은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다.
그곳은 고풍스러운 전통 가옥이었다. 총리대신의 집인 모양이었다. 총리대신은 정원에서 몸을 흔들어 날개 같은 것을 떼어내더니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그리고는 마루를 성큼 올라가더니 안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태용도 그를 쫓아갔다.
태용은 전통식 미닫이문을 밀어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방바닥의 중앙이 뚜껑처럼 열려 있었다. 태용이 그쪽으로 가자 바닥 아래에 쇠로 된 뚜껑 같은 것이 막 닫히는 중이었다. 태용이 재빨리 뚜껑을 잡아당겼지만 뚜껑은 이미 안에서 굳게 잠겼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집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용은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집을 뛰쳐나갔다.
마당으로 나오자 저택 전체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진인가 싶었지만 다른 집은 멀쩡했다. 이 집만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저택의 기둥과 마루, 문을 포함한 모든 것이 와장창 무너지고 있었다. 태용은 뒤로 물러났다.
무너진 집의 잔해가 아래로 꺼지는가 싶더니 다시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밑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땅이 진동하면서 땅 밑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잔해 사이로 거대한 손이 솟아오르더니 태용을 향해 떨어졌다. 태용은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거대한 손이 정원 바닥을 짚더니 잠시 후 또 다른 거대한 손이 올라왔다. 강철로 만들어진 기계 팔이었다.
땅을 짚은 두 개의 손이 힘을 주더니 이윽고 무너진 잔해에서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머리가 솟아올랐다. 땅 위로 머리를 내민 그 강철 거인은 이윽고 상반신과 하반신까지 밖으로 나와 땅에 발을 딛고 우뚝 일어섰다.
태용은 고개를 들고 거인을 올려다봤다.
그것은 거대한 로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