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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륜재 Nov 27. 2022

초추의 양광, 그리고 30년대 근대화

모던 동아시아 독서의 보충글

* 이 글은 2009년 10월 23일 당시 한참 본격적으로 모던 동아시아의 책들을 읽고 있던 때에 쓴 상당히 감상적인 독후감입니다. 특히 5. 20세기 전반 우울한 반도의 카나리아들와 모던 동아시아 독서의 보충 자료로 여기에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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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이란 환경은 아침/저녁 또는 계절이 제거된 공간이다. 컴퓨터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다가 점심때야 고개를 들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잊고 있었던 가을 햇살이 거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머리 속의 연상이 꼬리를 물어 문득 '초추의 양광(初秋의 陽光)'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기억에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 이었지 싶어 타닥 타닥 검색을 해보았다. 짧은 글이기도 해서 인터넷에서 전문을 찾아 점심을 먹으며 읽어보았다. 정작 찾던 표현은 거기 없었지만, 단정한 모습의 이효석이 낮은 목소리로 1938년의 가을을 맞아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전문을 읽어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해보세요)


학교에서 이 글을 처음 배울 때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일제시대 수탈을 당해 조선민족이 모두 신음하고 있어야 하는때, 이효석은 어떻게 백화점에서 커피를 갈아 전차를 타고 오며 향기를 맡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준비하거나 스키를 타러 갈 궁리를 할 수 있는지. 지금도 이 글을 차라리 샘터지에 실린 2009년 현재의 평온한 중산층의 사소하지만 따사로운 생활의 기쁨을 묘사한 글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말이다.


10월 3일 링컨센터에서 열린 뉴욕 필름페스티벌에서 1934년작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를 봤다. 시골에서 약혼녀를 부잣집 아들에게 빼앗기고 올라와서 서울역 주위에서 화물 수하인을 하는 주인공, 주유소에서 일하며 병든 아버지와 어린동생을 책임진 여주인공, 오빠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유흥업소로 흘러 들어간 주인공의 여동생,그리고, 서울로 올라온 부잣집 아들과 그의 친구 고리대금업자 악한. 골프장으로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여주인공들을 농락하고, 참을 수 없는 주인공은 마침내 응징의 주먹을 휘두르고. 1934년이라는 시간만 고려치 않으면 그저 무심히 티비를 틀면 나오는 요즈음의 한류 드라마와 차이가 없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일본사회는 에로-그로-난센스라는 세 단어로 규정되는 폭발적인 서구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린다.챠리챠프린(찰리 채플린, 1932년 방일)이, 샤리텐푸루(셜리 탬플, 1936년 방일)가 일본을 방문하고 열광케만든다. 일본혼은 뒷전이고 유로파의 모단을 따라잡아야만 하는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모-단가루들이 비치 파자마와 스트로햇 같은 옷을 하늘거리며 긴자로 몰려들었다. 모-단 보이들이 카페에 몰려 메이드풍 앞치마를 입은 여급들과 스캔들을 나누고, 수없이 세분화된 시장을 타겟으로 한 잡지들이 창간되고 배포되면서 모단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긴자의 모-단 가루


그리하여, 일본 사회에 비로소 일반인들에게도 일상의 모단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론돈과 파리가, 아메리카가 일상에서 손에 잡힐듯한 거리에 들어오고, 제국의 신민들이 대중사회의 소비자로 탈바꿈했다.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 전세계적 경제공황을 빗겨가고 있는 일본의 내수-식민지 시장을 더욱 자극했다. 기존 질서에 대한 혁명으로서의 아방가르드도 도쿄에서는 모단을 판매하는 상업용 포스터가 되었다. 100년 동안의 내재적인 근대화 준비는 도대체 어디에 갔는지 무차별로 서양의 근대화가 이식되기 시작한다. 그나마 이를 따라오지 못해 낙오되는 루저와 마이너리티는 그로테스크의 대상으로 조롱과 구경거리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호랑이 등에 탄 모양으로 모던의 속도와 방향에 놀라 떨어지지 않으려 꽉 붙잡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욕망과 허무는 난센스와 에로로 채워졌다. 


이효석의 제1고보 및 성대 1년 선배이자 같은 동반자작가였던 유진오는 동아일보에 1938년 연재된 장편 '화상보'에서 이때의 일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시영으로서는 처음 보는 동경. 정거장 앞에 나서니 과연 장대한 대도회였다. 늘어선 높은 삘딩과 또 삘딩. 미친 듯이 내달리는 전차와 고가선과자동차들의 떼. 달음질치듯 바쁘게 왕래하는 수없는 사람과 또 사람....자동차 창으로 내다본 거리의 잡답만 해도 과연 정신이 황홀할 정도였다. 부윤옥이라더니 기름이 흘러보이는 화려한 고루거각. 다채한 복장에 농염한 하장을 한 젊은 여인들의 무리....이상스레 신경은 흥분되고 머리는 매맞은 모양으로 얼떨떨해..."   


도쿄가 파리와 뉴욕의 시뮬레이션이었다면, 그 도쿄의 시뮬레이션으로 조선에도 근대가 이식되기 아니 투하되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문예봉은 양장을 고르고(영화 미몽) 이효석은 커피를 사고(낙엽을…),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청춘의 교차로) 스키를 타러 가볼까 미쓰코시 옥상정원에서(날개) 조달수(소다수)와 가루삐스(칼피스)를 마실까(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제국의 2등 신민이 아니라 소비자로 등장하고 싶은 인간 군상들이 '별건곤'과 '삼천리'의 세상에 등장해서 경성 제일의 미녀를 논한다. 성대(경성제대)의 학생들은 '데칸쇼'*를 외치거나 '인터내셔널'을 부르면서 이와나미 문고를 거쳐 마침내 반도에도 도달한 19세기 말 유럽의 근대의 이미지를 소비하기 시작한다.

1940년 조선호텔 커피숍 커피를 마시는 여인은 최승희

총독부는 이제 반도의 스콧토란도화를 고려하기 시작하고 이효석도 잠시나마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한다.


그런데, 39년 지나사변이 발발하자 언제 무엇이 허용되었냐는 듯이 먼저 조선에서부터 근대를 모조리 빼앗긴다. 견고하다고 믿고 있었던 내지에서는 잠시 아직 일상이 지속되는 것 같았지만, 그나마도 만주에서 지나에서 또는 남양에서의 꿈이 스러지자 일억총옥쇄(一億総玉砕)의 기세에 그들의 모단도 그리 오래 가지않고 함께 빼앗기게 되었다. 문득 생각이 건너 뛰기는 제국주의의 폐해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오래 오래 치명적 트라우마를 앓는다는 점이 아닐까.  


그리고는, 이제 다시 '낙엽을 태우며'를 읽어보니 38년 조선에서 그래도 삶을 안온하고 희망차게 살아보자고, '소년처럼' 순진하게 '용감해지자'고 격려하는 조선 지식인의 모습이 안스럽기까지 하다.   


문득 내다본 눈부신 양광에 몸을 일으켜 나가 가을하늘을 한번 올려다 볼 생각은 없이'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면서'(낙엽을…), 그들이 내지에서 반도에서 그리도 꿈 꿔 마지않던 근대의 진앙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을 창문 밖을 우연히 내다보았다가, 이제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넘어가는데 아직 19세기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의 한편 단내 나는 악몽 같은 오래된 신기루에 대한 쓰잘데없는 잡상 만을 적어보았다.  


*'초추의 양광'은 정작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있었다.

*낙엽을 태우며, 이효석, 조선문학독본, 1938,

*청춘의 십자로,1934, 감독 안종화, 주연 신일선

*미몽, 1936, 감독 양주남, 주연 문예봉

*화상보, 유진오, 동아일보 장기연재, 1938.

*날개, 이상, 조광, 1936.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 1934 ,

*데칸쇼 =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별건곤, 1926년도 창간 삼천리와 쌍벽을 이룬 종합대중잡지 

*삼천리, 1929년 창간. 조선 최고의 미녀관련 대담은 1935년 11월호 

*골프장: 경성구락부 1924년 개장

*스키장: 원산 스키장 1929년

*38년 이효석은 평양에 있었는데, 평양에 이미 조지야, 미나카이, 평안 백화점이 있었다고 한다. 화신 평양점도 나중에 문을 열었다.


읽어보면 재미있을만한 책들: 

Miriam Silverstein, "erotic Grotesque nonsense - The Mass culure of Japanese Modern Times", 2007 일본의 20~30년대 근대화에 대한 미시사 책이라고나 할까, 상당히 재미있는데, 솔직히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언제 다 읽고 난 후 다시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소래섭, "에로 그로 넌센스 - 근대적 자극의 탄생", 살림지식총서 154, 2005  얇지만 조선의 '에로 그로 넌센스' 열풍에 대해 잘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조이담, 박태원,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2005  구보씨의 일일동안의 걸어간 길을 다시 트랙백해보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말끔한 청계천은 머리에서 지우고, 인생이 살아있는 청계천변을 구보씨와 함께 걸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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