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설과 신소설의 세계
앞전의 글 책에 관한 책들 조금 더 (brunch.co.kr) 말미에 커버 이미지로 사용한 '근대서지'의 표지에 실린 '개벽'에 대한 언급을 하며 이 디지털 아카이브의 신세를 톡톡히 졌다고 하였었다. 2020년과 2021년 연이어 다른 두 분의 연구자와 함께 '건축역사연구' 학회지에 한국 초기 근대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발굴과 소개를 하는 논문을 두 편 발표한 일이 있다.1 원래 SNS 상에서 호기심이 동해 서로 얘기를 나누던 것이 일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건축사학계에 정식으로 논문 발표가 되고 이제 나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알고있다. 그런데 이 연구의 본격 시발점이 된 것이 2018년에 이훈우의 건축설계 사무소 광고를 '개벽'지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현담문고(당시에는 아단문고)의 아카이브에서 개벽지를 모두 뒤져 이 광고를 찾아밸 수 있었된 것은 실은 그 전부터 이 디지털 문고를 종종 뒤적거려왔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책에 관한 책들부터 (brunch.co.kr)에서 소개한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박진영, 소명출판, 2013)에서 이전에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근대 출판 초기의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최남선과 신문관, 이해조, 이인직으로부터 근대 출판이 시작되어 신소설들이 범람하기 시작하던 20세기 초반이다. 여기 정리되어 실린 신소설의 목록은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내용도 모르고 제목만 외웠던 혈의누(1906), 금수회의록(1908), 자유종(1910) 정도가 아니라 내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책제목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신소설들을 찾아 다시 읽기 시작하니 이 안에는 의외로 개화기 막 밀려들어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풍문들에 마치 카페인을 맥스로 충전한 스포츠드링크를 들이킨 것 마냥 흥분들로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예를 들어 볼까, 아래의 이미지는 1906년 10월 4일자 석간 "만세보" 1면 이인직의 연재소설 "血의 淚" 45회 중 부분이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과 같이 연방을 삼아서,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스마르크' 같은 마음이요,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권리를 찾게 하며, 또 부인도 나라에 유익한 백성이 되고 사회상에 명예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마음이라." (이미지 중 박스 부분의 현대어역.)
그러니까 여주인공 옥련이는 여자라도 공부해서 남자에게 압제받지않고 양성평등을 찾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발칙하고 신선하며 매혹적인 We Can Do it 이 초창기 신소설 여기저기 끝없이 행간에 숨어있었다.
신소설과 그리고, 동시기에 발행되던 딱지본2 고소설에 흥미를 가져 우선 책들을 읽어볼 수 있는 아카이브 소스를 찾다 앞서 얘기한 현담문고 (adanmungo.org)와 국립중앙도서관의 국립중앙도서관>디지털컬렉션>주제별컬렉션 (nl.go.kr)을 주로 활용하게 되었다. 아단문고(지금의 현담문고)에서는 고전 총서 시리즈로 이 딱지본 신소설과 고소설 영인본을 발간하였고 3권이 내 책장에 꽂혀있다.
*륙전쇼셜: 심쳥젼, 젼우치뎐,져마무젼, 서울 신문관 발행본 영인본, 아단문고 고전총서 1, 현실문화, 2007, 초판1쇄
*특별 숙영낭자전 부감응편 제삼권, 경성서적업조합소 발행본 영인본, 아단문고 고전총서 5, 현실문화, 2007, 초판1쇄
*홍길동젼, 경성서관 발행본 영인본, 아단문고 고전총서 8, 현실문화, 2007, 초판1쇄
딱지본 신소설 중에 전자책으로 구입한 것은
*목단화, 김교제, 온이퍼브, 2013
1911년 광학서포 발행 영인본
*이팔청춘, 강은형, 현대어 번역 박수녹, 올댓북, 2017
1925년 대성서림 발행 현대어 번역본
고소설과 달리 신소설은 결국 총독부의 검열과 통제로 인해 1910년 이전의 흥분이 10년대 20년대로 넘어가면 상당히 가라앉고 대신 자유연애와 이루기 어려운 사랑의 바람이 몰아친다. 사실 생각보다 요즘 K-drama와 그리 다르지 않는 콘텐츠들이다.
이 목단화와 이팔청춘 두 권은 서로 다른 포맷으로 발행되었다. 하나는 영인본이라서 원래 1911년 발행 모습 그대로 읽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현대어로 번역되어있다. 어느쪽이 더 좋은가는 사실 말하기 어렵다. 영인본의 경우 실은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고소설이나 신소설의 경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 한국어 도서와는 어휘의 차이뿐 아니라 표기의 차이가 적지않게 있다. 표준 맞춤법이 부재한 것도 그렇고 띄어쓰기가 대부분 되어있지않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출판부에서 '조선 왕실의 소설'이라는 시리즈를 출간한 적이 있다. 이 시리즈에는 백그라운드 스토리가 있다.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는 마지막까지 왕실의 여성들이 거처하던 곳인데, 그 부속 건물 중의 하나인 석복헌의 다락에는 원래 각종 패물들이 보관되어있었다고 한다. 이 패물과 함께 18세기부터 궁중의 여성들이 읽던 한글 고소설들이 같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일부 파손되고 이후 1966-1967년 사이에 정병욱 선생의 발굴 해제작업을 통해 1969년 국어국문학지에 「낙선재문고 목록 및 해제」라는 논문으로 창작소설, 번역소설, 가사, 기행문, 역사서 등등 113종 2000여 책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중에서 소설류는 83종인데 대부분 궁서체로 씌여진 장편 소설들로 홍루몽의 한국어 번역본같은 중국 청대 소설의 번역본과 조선 후기 창작 소설 등이 뒤섞여 있어, 일부 소설은 이게 조선 창작소설인지 알려지지 않은 중국소설 번역본인지, 아니면 중국소설을 저본으로 한 번안 소설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야 이 소설들의 현대어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고, 이 중 11권이 '교주본'이라는 주석을 달은 원문과 현대어로 번역한 '현대어본'으로 나눠져서 총 22권이 2019년까지 각각 나왔다. 교주본은 원문 표기는 그대로지만 그래도 띄어쓰기를 하여 가독성을 높이기는 했다.
*태원지, 조선 왕실의 소설 2, 교주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0, 1판1쇄
태원지는 이 시리즈의 두번째 책이다. 이 책은 처음에 중국소설의 번역본으로 알려졌는데, 왜냐하면 중국역사회모본3이라는 책에 포함된 각종 책목록에 이 태원지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에 아니야 이 태원지는 중국소설인 것처럼 쓴 조선 소설이야 라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요즘은 일단 대체로 삼국지연의 등의 영향을 받은 조선 창작 소설로 간주하는 분위기로 알고 있다. 태원지의 원작은 현재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볼 수 있다. 고소설이긴 한데 앞뒤가 상당히 분위기가 다르고 앞편은 오딧세이아풍의 해양 모험기라면 뒷편은 중원땅이 아닌 뭔가 미국 대륙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액션 정복 모험기이다. 개인적으로 오래 한국 지식인의 메인 패러다임이었던 중원 중심의 세계를 벗어나는 파천황적 소설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고 있다.
*셔해풍파, 이상춘, 유일서관, 1914,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이 책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여기 빠뜨리면 안될 정도로 '내 서재'에 중요한 책이다. 2006년 한국학진흥원에서 현대어로 번역 출간하였는데, 나는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의 원문으로 이 책을 읽었다. (국립중앙도서관>통합검색>통합검색결과 (nl.go.kr)에서 원문보기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인들에게 이어 근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에 태원지를 이어 세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확장된 것이 보인다.4
형식과 표현과 내용이 다르지만 태원지에서 셔해풍파처럼 뭔가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 그리고, 이 신소설에서 시간을 조금 더 나가면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근대문학가들이 등장한다. 책장에 꽂혀있는 이 근대문학가들을 다음편에 소개를 해보겠다.
註
1.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 김현경, 유대혁, 황두진, 건축역사연구, 통권130호, 건축역사학회, 2020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추가 연구 및 관련 자료', 김현경, 유대혁, 황두진, 건축역사연구, 통권136호, 건축역사학회, 2021
이 논문들에 관련된 내용은 몇군데 기사 중에 가장 최근 기사 “한국 최초 근대 건축가, 이훈우를 찾아라”가 있으며, 브런치 매거진 이훈우를 찾아서 매거진 (brunch.co.kr)에 이 연구와 관련된 글들이 올라와 있다.
2. 딱지본은 20세기 초반에 이전의 필사본 위주의 고소설이 본격 근대 출판물로 발행되어 시장이 형성되면서 표지를 알록달록 딱지처럼 그려 나온데서 유래한 표현이라고 한다.
3. 중국역사회모본(中國歷史繪模本)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762년 보통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로 추정하는 완산 이씨가 만든 중국의 소설들에 나오는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려 모은 일종의 중국 소설 일러스트집이다. 그런데 2009년 실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며칠 전에 친필로 이 책의 서문을 섰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던 흥미로운 책이다.
4. 셔해풍파는 대대로 서해바다에서 어부로 살아오면서 할아버지 아버지를 바다에 잃은 리해운과 리해동 형제가 넓은 바다를 보고 싶어 배를 띄었다 풍파를 만나 조난을 당해 서로 생사를 모르도록 헤어지게 되었는데, 형 해운은 다시 해적을 만나 두 번이나 죽을 뻔하다 육지로 돌아와 동생이 그만 죽은 줄만 알고 실성하여 지내다, 우연히 물에 빠진 황해감사 아들을 구해주고 그제서야 자신도 정신이 돌아왔는데, 그 사이 동생 해동 역시 형이 죽은 줄 알고 시름에 빠져 전국을 주유하다 원산에 들어온 화륜선에 매료되어 이렇게된 바에야 조선술을 배우자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고, 제국대학 조선과에 들어가려 일본어부터 배우며 진력하고 있었는데, 이런 조선인이 있더라는 소식이 마침 서울에 올라온 형에게 전해지었으니, 동생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 해운은 오매불망 동생을 만나러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그 사이 엇갈린 동생 해동은 제국대학에 연거푸 실패하여 차라리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침내 워싱턴 대학에서 그토록 바라던 조선술을 배우게 되었으니, 뒤이어 일본에서 동생이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알게된 해운은 그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에이, 삐, 씨, 띠'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원하던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항해술을 배우는데, 우여곡절을 뒤로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결국 서로 만나게 된 형제는 각각 공부를 마치고 함께 '남극 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탐험을 나서고 이들이 남극대륙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소설의 끝을 맺는다. (신소설풍으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