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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중독

하려던 말은 어떻게 사라질까.

by 대낮

류귀복 작가님처럼 제목에 중독을 붙여 봤다.

작가님은 무려 "출간 중독"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 중이시다.

나는 평소 글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아는 말도 계속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다.

별 쓸데없는 버릇 같지만 나에게 이 시간은 나름 귀하다. 어느 브런치 작가가 이렇게 적었더라. "브런치에 글만 쓸 수 있어도 좀 살 것 같다"라고. 그랬더니 다른 작가가 "맞아요" 하며 댓글을 달았다.

(되도록이면 그냥 갖다 쓰지 않으려 하는데 기억이 안 납니다. 내 글이다 싶은 분은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 그분이 한가한 내 브런치를 과연 볼지. 쿨럭. 제 글은 진짜 몇 명 안 보니까 눈감아 주세요. 뻔뻔. ㅎ)

너무 바쁘고 신경 쓸 게 많고 세상 살기 피곤해서 글 쓸 마음의 여유가 없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여유가.

좋은 글이든 나쁜 글이든, 진심이든 거짓이든 쓰려고 앉아 있다면 그게 바로 플렉스라는 말. 그러니 쓰는 시절은 좋은 시절이라는 의미 같았다.

나도 내가 한 단어를 눈앞에 두고 멍 반, 생각 반 할 때면 '요새 마음에 여유가 좀 생겼나' 하고 자문한다.

한참 교정지 붙잡고 지낼 때는 생각이 확장되지 않도록 붙잡는 게 일이다. 궁금하다고 찾아보고 생각난다고 생각하고, 문장으로 머릿속에 적어 보다가는 교정지가 넘어가질 않는다.

오늘 최근 교정 보던 우주 관련 책의 3교를 넘겼다(제발 별 탈 없이 나오기를). 그러니 여유가 있다.


얼마 전 빌려온 고양이 작가님 브런치에서 아래 문장을 봤다.


"엄마의 고지식한 말을 이리저리 톺아보고 수십 가지 대답을 나열하다가 그냥 문대버리고 만다."


전화통화를 하는데 말을 하려다 말았단다. 작가니까 당연하지만 단어 꽤나 골라 쓰시는구나 생각했다. 이 표현이 왜 인상적일까 며칠 생각해 봤다. 이 글을 읽은 지는 좀 됐다.

그럼 하려던 말은 보통 어떻게 사라질까. 이런 상황에 쓰이는 관용구는 대개 이런 것들이다.


말을 삼켰다.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빌려온 고양이 작가님이 하려던 말은 아마 이렇게 얌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참기가 어려워 애써 문대버려야 사라질 정도였겠지.


무당벌레 작가님 브런치에서는 이 문장을 만났다.


"내 경우엔 '대답하지 않고 뭉개버리는 아들'이라는 속상함이었던 것 같다."

아들은 입 밖으로 말을 잘 하지 않거나 짧은 대답만 한다. 대화가 아빠와 아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연결하거나 완충 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텐데, 그걸 아들이 뭉개버리는 모양이다.

아들의 말이 사라지니 말이 지나다닐 길도 사라져 버렸다. 이건 아들이 말을 삼켰다거나 입을 꾹 다물었다 정도로는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문장은 어떨까.

"나는 하려던 말을 도로 먹었다."

내 교정지에 이 문장이 보인다면 아무 메모도 달지 않고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멈춰 생각할 것이다. 한참 생각한 이유는 "말을 먹는다"는 것이 "너 왜 내 말 먹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관용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황에 맞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지나치는 이유는, 내가 글쓴이는 아니니까.


내가 내 말을 먹었다고 하면 어색하다. 밖에 있는 게 입안으로 들어가야 '먹는다'라는 표현에 어울린다. 내 말이라면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 삼키거나 맴돌게 하거나 입을 다무는 게 자연스럽다. 그나 저나 이 표현도 참 상징적이다. 말은 소리이고 의미인데 그걸 삼키거나 그것이 맴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너 왜 내 말 먹냐."

아무튼 이건 대단히 구체적이고 정확한 말이다 내 말이 너에게 전달된 것을 내가 분명히 아는데 네가 내 말을 없애버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가하게 이러고 있다. 플렉스. 인터뷰 원고 써야 하는데... 원래 진짜 써야 하는 건 잘 안 써지는 법. 큰일이다. 김똑띠 작가님(김동진) 질문지 답변이 오늘 도착했다. 브런치 글을 읽을 때도 눈치챘지만 답변지를 보니 꽤나 섬세한 분이시구나 싶다. 힘 빼고 쓰신 글에서 '작가력'이 느껴진달까. 글에 인상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한편 그 원리가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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