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동기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나보다 많은 책을 편집해 봤으니 그 말이 어느 정도 맞겠거니 하고 들었다. 나는 책을 처음 내는 작가의 책은 작업해 본 적이 없으니까.
책에서 초고가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크다. 편집자가 기획과 편집을 하고, 디자이너가 디자인하고, 인쇄소에서 인쇄한 책이 결국 작가의 이름으로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 아닐까. 많은 독자가 아직도 책의 모든 부분을 작가가 맡아서 한다고 생각한다. 책 제목을 출판사 편집자가 바꿨다는 말에 놀라는 독자도 있다. 근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면, 작가가 조사 하나 건들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긴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책은 작가의 것이다.
여기서 초고는 작가가 이제 막 쓴 글이 아니다. 출판사에서 교정 보기 전 원고, 그러니까 일차로 작가의 교정은 거친 원고이다. 그러니 작가 입장에서 편집부의 교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볼 만큼 봐서 넘겼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후 끝없는 교정 과정을 주고받다 보면, 알아서 해주세요, 이제는 더 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만큼 읽은 원고, 다 된 것 같아 보이는 원고를 읽고 또 읽는 일은 질리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이 아니라 단행본에 실리는 깔끔한 글이 된다. 클릭해서 대충 읽는 독자는 물론, 한 문장씩 정독하는 독자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글이 되는 것이다.
많은 경력이 있는 작가의 초고도 편집부에서 빨간 줄이 간다. 빨간 줄이 다 틀렸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어조의 통일과 표기의 일관성과, 맥락의 두드러짐을 위해 자잘하게 손 가는 부분이 많다. 편집 실무 역시 단행본으로 묶은 책이 여러 권 출간됐을 정도로 전문 분야다. 감으로 취향으로 하는 게 아니다. 여러 권 책을 낸 작가들은 이 과정을 예상하고 있고, 협조적이다. 물론 출간 경력과 상관없이 글을 대충 쓰고는 틀린 걸 신경 안 쓰는 듯한 작가도 있긴 하다. 뒷일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편집부에서 알아서 고치겠지 생각하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드는...!(내 경험은 아니고 오랜 경험이 있는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다.ㅎㅎ 그래 놓고 책이 나오면, 맞아 내가 이렇게 글을 잘 썼지? 하는 표정이라는....)
자기 글을 다시 읽으며 교정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교정 볼 때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는지, 얼마나 하기 싫은지. 그리고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은 편집자가 초고를 어떻게 읽을까 생각해서 완벽한 원고를 넘기려 애쓴다. 대충 넘기면, 고칠까요? 고치는 게 어떨까요? 듣는 게 더 귀찮은 걸 아니까. 굴욕 없는 초고는 없다. 어느 단계의 초고가 공개되느냐에 달렸다. 글빨이 약해도 아이디어가 좋으면 유명 작가가 된다고 한다. 그래도 글빨도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자기 '문장'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유명 작가라면 더더 좋지 않을까.
옛날에(?) 잡지사에 있을 때 여러 작가들의 원고를 받아 보면, 전문 문인으로 불리는 사람들 글은 고칠 게 별로 없었다. 책 한 권이 아니라 한 편의 글이니까 더 많이 확인하고 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분량을 맞추느라 문장을 합치거나 빼는 작업이 없을 수는 없는데, 한 글자도 고치지 않은 원고가 있었다!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조사 하나를 바꿨다가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이 정도로 글을 손봤다면 그 조사에 담긴 의미를 의도했겠구나 싶어서다. 분량도 완벽했다. 그 글의 주인공은 작가 한강이었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해서 글 읽다가 진짜 이렇게 젊은 사람(나보다 많았지만 ㅎㅎ)이 쓴 글일까 싶어 작가 사진 한 번씩 보곤 했던.... 한강 작가는 다들 알다시피 잡지 "샘터"의 편집자로 일한 적 있다. 편집자의 일과 마음을 아는 작가였던 것.
책을 처음 낸다면, 편집자가 당신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싸우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ㅎ 참, 이 비슷한 말이 얼마 전에 출간된 "사춘기를 위한 짧은 소설 쓰기 수업"이라는 책에도 나와요. 이 책은 교정 교열을 보면서 여러 번 읽었는데.... 소설 쓰기는 물론 책 출간 관련 정보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보면 좋을 듯~. 책 사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