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새 암

갯새암 <, 내 어머니의 샘>.

by 박민희


옛날 우리 동네엔 원님이 마시던 작은 샘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샘을 ‘갯새암’이라고 불렀다. 한여름에도 얼마나 물이 차갑던지, 주전자에 그 물을 담으면 주전자 밖에 냉기가 서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곤 했다. 여름날, 엄마는 종종 가지냉국이나 오이냉국을 해 먹을, 갯새암의 차가운 물을 떠 오라고 하셨다.

갯새암은 우리 동네 동구 밖 거의 끝 집인 금순네 집 뒤, 물망골 입구에 있었다. 백경 언니네 포도밭에서부터 금순네 집으로 가는 길은 논두렁과 들판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외길이고 인가가 없어 조금 무서웠다. 또 어린 걸음걸이에 제법 먼 길이기도 했다.

동네 끝 외딴곳에 금순네와 철호네 두 집이 살고 있었는데, 갯새암은 금순네 집 담벼락 뒤 감나무와 살구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그곳에 있었다. 갯새암 옆으로 물망골로 가는 들판이 이어져 있었다. 물망골로 가는 길목엔 혜경 언니네 콩밭도 있었고, 화자네 복숭아밭도 있었다. 또 우리 집 땅콩밭과 논도 그곳에 있었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 농사나 밭일을 하러 가는 길목이기도 해서 갯새암은 우리 온 동네 사람들의 샘터이기도 했다.

오후가 되면 저마다 나물이나 쌀을 들고 와서 갯새암가로 모여들곤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갯새암 주변에서 나물을 다듬고 쌀을 씻으며 이야기꽃을 피웠고, 동네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은 들에서 돌아오는 길에 꼭 갯새암에 들러 시원한 물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이곤 하셨다.


샘은, 어린 내가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을 만큼 안전했고, 혹시 실수로 샘에 빠져도 겨우 허리에 닿을 만큼 수심이 낮았다. 신기하게 이 샘은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물이 솟아났다. 작은 샘에서 흘러넘친 샘물은 또 하나의 작은 개울이 되어 흘러갔다. 우린 거기에서 물장난도 치고, 이끼 낀 돌 사이로 난 돌나물을 뜯으면서 놀기도 하였다. 갯새암에서 흘러내린 물은 도랑을 이루어, 금순네 집 맞은편에서 언니들이 앉아 빨래를 하기도 했다.

여름날 저녁, 가끔 동네의 처녀들은 갯새암에 모여 등목을 하기도 했다. 물이 너무 차가워 샘물에 발만 씻어도 이빨이 딱딱 부딪칠 만큼 시원했다…. 그래서 날씨가 너무 더워 헉헉대는 한여름 밤에는, 서로 망을 봐주며 등목을 하러 가곤 했다. 가끔 짓궂은 동네 오빠들이 몰래 숨어 볼 때도 있어, 우린 똘똘 뭉쳐 둘러앉아 원을 만들어 가려 주었다. 갯새암 바로 뒤가 물망골 가는 산길이라 무섭기도 했지만, 여러 명이 한꺼번에 움직여 재미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작은 고모의 손을 꼭 잡고 다녔었다.

갯새암은 어린 날 우리에겐 아주 좋은 놀이터이기도 했다. 가끔씩 들에서 돌아오는 동네 할아버지께서 지게에서 참외나 복숭아를 꺼내 샘가에서 놀던 우리에게 주실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시원한 갯새암 물에 씻은 맛있는 과일을 샘가에 둘러앉아 다 같이 먹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온 후 집이 그리울 때면 꼭 갯새암도 함께 떠올랐다. 그곳에서 친구들이랑 공기놀이를 하거나 땅따먹기를 하던 추억들이 그리움과 함께 밀려오곤 했다.

갯새암과 우리 마을도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많이 바뀌었다. 갯새암 근처였던 금순네 집과 철호네 집, 그 일대의 크고 작은 논밭들이 다 사라지고 그곳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어릴 때 우리가 자주 올라가 놀던 뒷동산만이 체육공원으로 바뀌어, 아파트 옆에 그대로 있어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었다.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타지에서 생활하던 나는, 고향 집을 찾을 때면 언제나 갯새암에도 들렀다. 그러나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서 갯새암은 더 이상 없었기에, 그곳을 지날 때마다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다.

마을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대부분 집들이 다 개량했거나 새로 지었고, 타지에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근사하게 집을 지어, 옛날 시골 마을 풍경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몇 안 되는 집들만이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은 시골과 도시가 뒤섞인 모습이다. 그사이, 우리 집도 마당이 넓은 기와집에서 빨간 벽돌의 단층집으로 바뀌었다. 옛날 탱자나무 울타리가 빙 둘러싸고 있던 모습은 벌써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 빨간 벽돌의 단층집엔 여전히 엄마가 살고 계셔서, 내게는 똑같은 시골 고향 집이었다. 마당엔 엄마가 농사지으신 채소가 계절마다 가득했고, 담벼락 밑엔 석류나무, 대추나무가 서로 키 재기를 하며 서 있었다. 엄마는 대문 대신 장미를 심어 울타리를 만드셨고 그 옆엔 포도나무도 심어 놓으셨다. 덕분에 5~6월엔 장미가, 7월에는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 아치형의 아름다운 출입구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시골집에 갈 때마다 아치형의 장미 넝쿨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해, 옛날 백경 언니네 집 뒤로 공원이 만들어졌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시에서 조성한 공원인데, 그곳에 갯새암이 다시 찾아왔다. 금순네 집 뒤편에 있던 갯새암의 물줄기를 끌어와 공원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갯새암의 유래를 적어 놓은 돌비석과 함께 옹달샘 모양의 물이 항상 솟아나는 샘을 복원해 놓은 걸 보고 얼마나 반갑던지…. 갯새암의 물은 여전히 차갑고 시원했으며 공원에 놀러 오는 사람들의 갈증을 씻어 주었다.

작은 공원은 갯새암을 중앙에 두고 오른쪽으로는 운동기구와 아이들의 놀이기구가 있었다. 또 반대편으로는 커다란 나무 아래 정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엄마는 갯새암의 물을 페트병에 담아 작은 구루마에 싣고, 동네 어귀에 있는 고구마 밭으로 가서 물을 주곤 하셨다. 또 밭에서 뜯어 온 채소를 갯새암에 들러 씻어 오기도 하셨다. 동네 할머니들도 밭에 갔다 올 때면 잠시 들러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정자에 앉아 쉬어 가곤 하셨다. 그 옛날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던 그 갯새암이 다시 우리 마을의 사랑방이 되어 찾아온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부터 시골집에 가면,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서 꼭 갯새암에 들르곤 했다. 공원의 정자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으면 가끔 정다운 얼굴들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주민의 반 이상이 타지 사람이라 옛 친구들은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마을을 떠나지 않은 친구네 가족이나 언니, 오빠를 가끔 마주칠 때도 있어, 옛 향수를 느끼게 했다.

어린 날의 추억이 깃든 갯새암이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와서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시골 고향 집을 떠올리면 그곳에 엄마와 갯새암이 여전히 솟아올라 우리 곁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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