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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천사들

갯새암<<내어머니의샘>>

by 박민희


고향을 떠나 부산에 온 나는 남천동의 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지금은 없어진 학교지만 그 당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제법 큰 규모의 학교였다. 지금의 황령산 자락에 있던 학교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한 시간 가까이 올라가야 하는 산 중턱에 있었다. 각지에서 온 애들과 합류한 나는 처음으로 전라도나 충청도의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며 서로의 말투가 많이 다름을 신기해했다. 난 입학 때 교회 목사님의 추천으로 학비를 면제받았지만, 기숙사비는 내야 해서 가지고 있는 돈이 부족해, 한 달을 버티는 게 숙제였다.


다행히 입학과 동시에 바로 취업이 되어서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차비로 쓰며 생활했다. 산속에 위치한 기숙사는 광안리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활환경은 정말 열악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얇은 이불 하나로 서너 명이 덮으며 지내야 했고, 아침마다 산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로 세안을 해야 했다.


하루의 일과는 새벽 5시 점호의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기숙사생 전원이 운동장에 집합해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국민체조를 한 뒤 아침밥을 먹고 회사로 일하러 갔다. 오후 5시가 되면 회사에서 학교로 와서 밤 10시까지 공부해야 하는 고된 일과였다. 그런데 몸도 약한 나는 그 생활이 이상하게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던지라 그 춥고 열악한 2월의 산속 기숙사 생활이 재미있기만 했다. 같이 입학한 친구들 중 몇 명은 열악한 환경과 고된 일과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나와 함께 왔던 고향 친구도 두 달 있다가 밤에 몰래 짐을 싸서 집으로 가 버렸다.


후에 엄마가 친구의 얘기를 듣고 내가 걱정이 되어 다시 데리러 오셨다. 어머니는 기숙사 환경을 보고 매점 아주머니 앞에서 펑펑 우셨다. 매점 아주머니는 내가 제일 먼저 포기하고 갈 줄 알았는데 끝까지 남아서 대견하다고 했다. 1학년이 지나면 나가서 자취도 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했다고 한다. 엄마는 내게 다시 시골로 가자고 했지만 난 전혀 힘들지 않다며 그대로 있겠다고 했다. 비록 환경은 열악했지만 난 그 생활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반에서 1등을 하며 장학금도 받았고 선생님들도 너무나 잘해 주셔서 고향 집이 그립긴 했지만, 학교를 떠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엄마는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손에 적은 돈을 쥐여 주시며 굶지 말고 뭐라도 잘 챙겨 먹으며 지내라고 신신당부하시곤 시골로 다시 가셨다.


학교생활은 새로운 세계였다. 비록 생활이 빡빡하고 몸이 고달프긴 했지만, 친구들과 선배들이 내겐 다 숲 속의 천사들이었다. 일요일이면 우린 때론 교장 선생님의 인솔 아래 황령산 꼭대기에 올라가기도 했고, 기숙사 친구들과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줍기도 했다. 17살에 처음으로 본 바다는 내게 너무 신비로웠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가 계속 파도를 치며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자주 우리는 한 시간 거리의 바닷가를 걸어 내려가 해가 지기까지 떠들고 놀며 시간을 보내다 오곤 했다. 봄이 되자 학교생활은 훨씬 수월해졌다. 산속이라 5월에도 한기가 들었지만 우린 좁은 방에서 서로 부대끼며 챙겨 주며, 그렇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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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이 좀 안정되자 난 주일에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반주도 다시 하고 틈나는 대로 교회에 들러 피아노를 치고는 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사다 주셨던 작은 손풍금 덕분에 난 혼자서 피아노를 연습하며 시골 고향 마을 작은 예배당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반주를 했었다.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닌데 어느 날부턴가 찬송가의 코드를 다 찾아내 반주를 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어린 내가 찬송가 반주를 능숙하게 해내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고, 친구들은 내가 시내에 나가 따로 피아노 레슨을 받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난 힘들 때마다 아버지 친구 분이 목사님으로 계시는 시골 예배당에서 찬송가를 치며 마음의 평화를 얻곤 했다. 형편이 안 돼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나를 늘 눈여겨보시던 목사님은, 추천서를 써 결국 부산의 고등학교에 날 보내 주셨다. 먼저 간 친구의 딸을 보살펴 주고 늘 챙겨 주신 덕분에, 난 교회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랄 수 있었고 학업도 계속할 수 있었다. 부산에 와서도 교회 생활은 내게 또 하나의 안식처였다. 교회에서는 내가 원할 때마다 피아노를 마음껏 칠 수 있게 해 주어서 훗날 대학을 갈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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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레슨을 받았다. 나를 테스트해 보신 선생님은 꼭 음대에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실업계고등학교에 다니는 나에겐 먼 꿈나라 얘기같이 들렸다. 레슨비를 낼 형편이 안 되었던 난, 원장 선생님의 배려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선생님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레슨을 받았다. 그 당시, 음악을 전공하려면 레슨비가 많이 들어서 부산의 교회 친구들은 내가 엄청 부잣집 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도 굳이 내 가난을 얘기하지 않았고 항상 밝아, 교회 친구들은 내가 고생 한번 안 하고 귀하게 자란 줄로만 알아 가끔씩 입장이 곤란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예비하심 아래 넉넉지는 않지만 때를 따라 돕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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