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고 보니 밥집을 닫고 집에 들어와 있었다.
지금은 전주 객리단길이라 불리는, 3년 전 당시엔 오가는 사람이 손에 꼽히던 동네 끝자락에서 작은 밥집을 운영했었다.
학창 시절부터 꿈꾸던 일을 이뤄보고자 꿈만 있고 모아둔 돈은 없었던지라 맞는 곳을 찾아가다 보니 조용한 동네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 사장님들과 유동인구가 없는 곳에서 먹고살아 보고자 노력을 했었다. 그 노력으로 저녁 6시만 되어도 깜깜하고 조용했던 동네에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조용했던 동네가 활기를 띄는 듯 함에 기뻤던 것도 잠시, 30년 40년씩 그 동네에서 사시던 주민 분들이 쫓겨나기 시작했다.
가진 것이 없어 열심히 했던 노력의 결과물이 본의 아니게 어르신들을 쫓아내게 된 것 같아 초반엔 죄송함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 일은 나에게도 곧 다가올 일이었었다.
2년 동안 임대를 하겠다고 계약을 했었지만 주인 할아버지는 1년째 되던 날 찾아왔다. 2년이 지나고도 여기서 쭈욱 장사를 하고 싶다면 지금 월세를 상향 조정해야 한다고...
맛집이라 소문이 나고 웨이팅 하는 손님이 있어 할아버지가 보시기엔 월세를 올리는 게 맞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렇지만 원 테이블 식당이라 손님이 꽉 차도 8명에서 9명이었고, 주인 할아버지께서 생각하시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속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원래 계약대로 2년까지만 운영을 하고 나가겠노라 했는데, 그로부터 딱 한 달 뒤 할아버지께선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시게 되었다.
주인 할아버지가 떠나시고 할아버지 댁의 복잡한 가정사로 얼떨결에 1년이란 시간을 더 벌게 되었고, 1년 뒤엔 재계약이 불투명하니 '남은 시간은 올해 10월까지 만이다'라는 생각으로 그 이후를 준비했다.
그렇게 밥집과 소품샵을 겸하다가 곧 쫓겨날 10월이
다가오게 되었다.
밥집을 그만두게 되어도 살고 있는 집의 월세도 내야 하고 우리 호야(반려묘) 사료도 사줘야 하니, 하루라도 일을 멈출 수가 없다는 생각에 당장 그만두어도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온라인 쇼핑몰도 할 수 있게 소품샵을 한 것이었다.
처음엔 좋았다.
내가 팔았던 소품들은 문방구라는 이름에 걸맞은 아기자기 귀여운 것들이었다.
주로 일본과 중국에서 물건들을 가져왔는데 그때쯤 일본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나는 과거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태극기 한 장쯤 그리거나 뿌리거나 했을 사람이라 당연히 일본에서 만든 제품은 더 이상 가져오지 않았고 가지고 있던 제품들도 재고로 떠안았다.
모든 만물은 중국에서 만들어지는구나 싶게 퀄리티 높은 귀여운 물건들은 가져올 수 없어도 그래도 아쉽진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중국의 공장들이 일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고 중국 안에서도 배송이 느려지고 한국에 도착해서도 통관이 두배 세배로 걸리게 되었다.
그맘때쯤 나는 이미 힘이 남아돌아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하고 있을 때라 본업과도 마찬가지였던 쇼핑몰을 접기로 했다.
이 일도 벌써 작년이었네라고 할 만큼 시간이 흘렀구나.
그땐 하루하루 살아서 버티기가 목표였는데.
내 뜻대로 안돼서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버틴다기보다 정말 말 그대로 생존.
갑자기 어떻게 이렇게 돈이 없어지지?
왜 돈을 버는데 돈이 없지?
정말 이상했다.
만원이 뭐야 몇 천원도 없어서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그 돈으로 라면을 사서 든든하다 며칠은 걱정 없네 했던 나.
스스로 이 나이는 어른이고 또 내가 하고 싶어 벌인 일들이니 내가 수습해야 한단 생각에 가족들에게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혼자 버티는 나를 보고 힘들면 제발 말을 해 달라 하였고 나는 당연히 그런다며 아직은 아니라 말을 안 할 뿐이라고 했다.
정말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롯이 혼자서 그 시기를 버텨내야지 그다음에 다가올 나의 다음 이야기들이 즐거운 이야기들로 쓰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난 지금까지도 평탄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닌데 그 굴곡의 마침표를 아주 강렬하게 찍었다.
혹독한 시기 속에서 내가 느낀 것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이야기들.
그냥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