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이야기;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순간들
날씨가 많이 서늘해졌다. 그렇게도 영원할 듯 강렬하게 내리쬐던 햇빛과 무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바람에게 시간을 비켜주고 있다. 지난 몇 개월 남짓 많은 일들이 있었다. 출장, 휴가, 여행, 결혼식과 장례식까지. 일상의 여러 변수들 속에서 뭔가를 꾸준히 해낸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꾸준함을 지닌 평범한 이웃들의 위대함을 다시 느끼게 된다. 나도 그 꾸준함을 다시 충전해 본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를 직장생활에 비친 소소한 일상으로 채우려 한다.
나는 직업 특성상 오늘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복닥거리며 살고 있다. 항상 좋을 수만은 없으니 갈등과 조율이 일상이다. 대부분 표현은 정중하지만 이권이 걸리다 보면 웬만한 멘탈은 버텨내기 힘들다. 특히나 밥줄이 걸리면 전쟁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 전쟁터에서 수십 년을 살다 보면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하게 된다. 수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닌 적당한 거리두기 정도가 되겠다. 그래서 내게는 상대와 감정적으로 뒤엉키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갈등의 순간에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 사람과 문제의 본질이 보인다.
전쟁터 같은 직장생활에서 복닥거리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그러니 감정적으로 뒤엉키지 않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남들에게 휘둘리는 순간도 많았다. 오지랖 넓게 남 일 참견하다 가시 돋친 충고도 가끔 들었다. 그때를 돌아보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오지랖을 부렸는지 스스로도 놀랍지만, 그땐 그랬다. 그때마다 남 얘기를 귀담아듣든 흘려듣든 내 선택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몇 마디가 있다. “너라면 다를 것 같냐?”, “네 평판에 신경은 쓰냐?”,,, 사실, 이 둘은 다른 듯 싶지만, 관계라는 상대적 틀 안에서 보면 본질은 같다. 자기 객관화..
오래전 회사에서 대규모 조직개편을 맞아 내가 맡고 있던 사업부에 신규 임원이 상사로 보임했다. 사내 평판을 알아보니 책임회피 성향이라는 피드백이 많았다. 많이 피곤하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상사는 비교적 합리적인 업무 스타일을 보였다. 상사의 평판이 틀렸구나 싶어 한참 잊고 지냈다. 하지만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의 진면목은 일상이 아닌 위기에서 드러난다. 사업부에서 대형 사건이 터진 거다. 우리는 사건을 신속히 처리해야 하는 매우 불편한 상황에 놓였다. 연일 계속된 경영진 보고 과정에서 상사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본질에 집중하기보다 세부 곁가지에 신경 쓰고, 경영진의 한마디는 금과옥조였다. 해결 방안을 찾기보다 직원들의 실수를 들춰 질책에 여념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직원들의 헌신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직원들은 부서 이동을 신청하거나 퇴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반면, 상사는 문제 해결의 공로자가 되어 더 큰 사업부로 옮겨갔다. 성과는 상사가 챙기고, 피해는 조직이 떠안은 것이다. 책임회피 성향의 리더를 가진 조직이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때 배웠다. 여러 날에 걸쳐 남은 직원들을 추스른 후 쓰라린 마음도 달랠 겸 퇴직한 선배님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나는 격정적인 서사를 곁들여 뒤틀린 감정을 쏟아 냈다. 선배님은 한참을 묵묵히 듣기만 하셨다. 잠시 정막이 흐르면서 애꿎은 술잔만 몇 순배 오갔다. 그러다 선배님이 한마디 툭 내뱉으셨다. “너라면 다를 것 같냐?” 취기를 빌어 나는 냅다 질렀다. “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선배님은 혀를 끌끌 차시며 몇 마디 더 보태셨다. “사람들은 다 자기 욕망을 쫓아가는 거야. 너도 평상시는 인격자를 모방하지만, 저 밑바닥에 서는 순간 추잡스러운 민낯이 드러나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를 힐난하고 있는 이 순간이 소모적으로 느껴졌다.
사회생활의 경험에 따르면 평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평가가 쌓여 평판이 되기 때문이다. 평가는 항상 주관적이며, 내가 처한 위치와 입장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니,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사람들로부터 축적된 빅데이터에 기반한 평판은 대체적으로 맞다. 흔히 ‘충조평판’ 금지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다른 것 같다. 나 또한 지금도 누군가를 평가하고,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받는다. 결과를 알려주느냐 숨기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평가는 항상 존재한다. 요즘은 인사평가조차 다면평가가 일반화되었다. 경력직 채용도 레퍼런스 체크라 해서 업계 평판을 조회하고, 중요 직책은 당락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내 경우에 비춰보면 평가 앞에서 대부분 자기중심적이 된다. 부하에게는 성과 위주의 피드백을 하고, 상사에게는 인간적 관계를 기대하는 모순된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다. 상사는 어렵고 부하는 편하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관계는 가까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나를 인정해 주기 바라는 인간적 기대가 앞섰다. 반면, 편한 관계는 더 이상의 가까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회사의 목적인 성과부터 앞세웠다. 결과적으로 상사에게는 서운함을 느끼고, 부하에게는 원망을 듣기 십상이었다. 상사와 부하 모두 내 입장에 비춰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데도 참...
사회생활에서 겪는 인간관계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상사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듯 부하직원 역시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편하게 생각해.” 라니... 불편한 사람에게 이처럼 허무하고 강요 섞인 말도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부하직원에게는 인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상사에게는 성과 위주 요구가 당연함을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사람들과 뒤섞인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모두의 바램은 엇비슷할 듯싶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지 않으며,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것이다. 주위 타인들이 자기감정을 현명하게 처리하는 건강한 성인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에서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기대와 달리 실상은 타인에게 휘둘리거나 상처받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자책과 원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꾸 헤맨다. 나 역시 아주 오랫동안 그랬다. 그러니 복잡 다난한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불편함을 인정하고 적당히 거리를 존중하는 아량을 가져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