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이야기; 다름을 이해하는 여유
나는 잘 살고 싶었다. 때마다 욕망의 대상은 다르지만 가슴 한편에 품은 소망이었다. 잘 산다는 게 뭔지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도 모른 체 막연히 품고 살았다. 쉼 없이 방법을 찾아 헤매도 봤다. 내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타인과 비교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정해진 방법이나 정답이 없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잊지 않으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살았다.
삶에 유용한 기술, 힘 빼기
삶이든 운동이든 초보와 고수가 있다. 초보는 몸과 마음에 힘을 잔뜩 들인다. 당사자는 힘겹고 보는 사람도 안쓰럽다. 시간이 흘러 초보도 고수의 반열에 오른다. 더 이상 잔기술은 관심이 없고 힘 빼기에 집중한다. 오히려 여유를 갖고 주위 상황을 두루 살피면서 기본기에 충실할 뿐이다. 고수는 언제 왜 힘이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다. 과욕이 여유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힘을 덜어낸다는 것, 그것은 '잡념'보다는 '집중'을, '과욕'보다는 '여유'를 채우는 것이다. 삶의 고수들은 덜어내야 할 것과 채워야 할 것을 잘 알고 있다.
실패에 관조하는 힘
21세기 대한민국을 살면서 마주하는 가장 힘든 단어는 '경쟁'과 '실패'가 아닐까 싶다. 경쟁은 환경이고 실패는 결과다. 삶에서 실패를 마주하면 참 난감하다. 누군들 초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오래전 인터뷰가 꽤나 인상적이다. 잡지에 실린 내용은 이렇다. "아니면 말고". 그가 초등학생 딸에게 학교 숙제로 써준 가훈이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세상 일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고, 내가 노력한다 해도 외부적 요인으로 흐트러지는 일들이 다반사다. 그러니 실패할 때마다 좌절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냥 ‘아니면 말고’ 식으로 툭 털고 돌아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어린 딸에게 가훈으로 써주었다."는 것이다. 실패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 떠올려봄직하다.
유일한 밑천, 꺾이지 않는 의지
나는 10대와 20대 시절을 무댓포 정신으로 살았다. 꺾이지 않는 의지만 있으면 뭐든 다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10대부터 자취를 했고, 20대 청춘을 오롯이 대학원 연구실에서 보냈다. 5년이 넘는 대학원 연구실 생활은 내 삶에서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A3 십여 장에 빼곡히 끄적이며 고등방정식을 풀어냈고, 72시간 동안 뜬 눈으로 코딩과 디버깅을 반복했고, 연구실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청하던 생활을 이겨냈다. 어떤 아쉬움도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축적된 경험과 에너지는 내 삶의 큰 밑천이 되었다. 모든 게 내 의지의 결과라 믿었다.
폭력의 또 다른 이름, 무지
20대에 축적된 경험은 내게 독특한 인식을 심어줬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곧 멀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실패는 반드시 의지가 박약한 사람 때문일 것이라 확신했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견고한 벽들도 굳건한 의지만 있으면 무너뜨릴 수 있다 믿었다. 더 나아가 상황이 열악할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을 주 기도문처럼 되뇌었다. 하지만, 30대를 거쳐 40대에 이르러 내 확신에 뭔가 큰 결함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내가 굳게 믿었던 개인의 의지에 한계가 있음을 통절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만큼 좌절도 컸다.
현실을 수용하는 용기
대학원 연구실 밖에서 마주한 현실은 내게 다채로운 역할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상황에 따라 Follower와 Leader를 병행했다. 그리고 내 의지와 달리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과 상황들이 늘어만 갔다. 특히,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들이 그러했다. ‘나 역시 의지가 박약한 사람인가?’ 스스로 자문했다. 수많은 좌절의 경험을 통해 내 신념에도 변화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불어 현실을 왜곡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의 중요함도 배웠다.
자각이 주는 선물, 성장
불혹의 나이 마흔. 내게 40대는 미혹되지 않기보다 유혹이 많은 시기였다. 유혹은 끊임없이 나를 흔들었고, 호위무사는 나를 지켰다. 그들을 통해 현실과 자각을 배웠다. 세상의 순리나 타인의 입장을 살피는 버릇을 힘들게 익혔다. 생각해 보면, 한 개인의 의지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습관이 아닐까 싶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도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뿐 지탄의 대상은 아니잖는가? 과거 나는 냉정한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누군가를 모질게 대했었다. 또, 뜨거운 열정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를 힘겹게 밀어붙여도 보았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빠진 열정은 폭력의 다름 아님을 알게 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틈새를 메꿔주는 힘, 이해와 인정
나는 오늘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현실을 살고 있다. 무댓포 정신을 휘두르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쳐대는 사람, 의지가 박약한 사람, 책임지지 않으려 회피하는 사람.. 그들 모두 내겐 소중한 인연이다. 내가 그러했듯 그들 모두 그렇게 하는 데는 각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선 모두 옳다. 그래서 나와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마주할 때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있다. 타인을 ‘이해’하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몸에 밴 습성이 아니다 보니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그럴 때마다 나지막이 내뱉으며 스스로 다잡는다.
“그러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