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이야기; 본질을 꿰뚫는 힘
주위에 프로 일잘러들이 더러 있다. 문제가 생기면 척척 해결해 내고, 환경이야 어떻든 뭐라도 이뤄내고, 맡은 조직마다 탄탄하게 영글어내는 사람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읽어내는 분석가, 신박한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기획자, 복잡한 상황에서도 명료하게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영자까지. 그들을 지켜보며 "일을 잘한다는 게 뭘까?" 궁금해졌다. 그들 모두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내가 찾은 공통점은 이렇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일의 본질을 이해하고 집중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 ‘Why’를 묻고 답하는 사유의 과정을 통해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통찰력을 기른다는 것이다.
정신치료를 받아보면 인격을 새로이 만든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힘들기도 하거니와, 자칫 자각을 놓치면 곧바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내가 치료자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정신치료 과정은 지난한 훈습訓習을 통해 지혜知慧를 기르는 것’이라고. 머리가 좋고 똑똑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혜는 적개심이나 상처가 치유되어, 현실을 꼬임 없이 직시하고 제때 실천하는 능력을 말한다. 지혜가 결여된 성실함은 무조건 좋다고 할 수 없다. 현실을 배배 꼬아서 바라보니 열심히 하는 만큼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결과만 보고 화를 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일이 있게 된 원인을 살핀다고 한다. 삶에는 늘 그럴만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아들을 위한답시고 뭐든 앞질러해 줘 아들의 주체성을 키워주지 못했다. 아들을 위한다는 내 마음도 현실은 내가 가진 결핍을 아들을 통해 대리만족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정작 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 전에도 그렇고, 아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조차 그저 막연하게 아버지라는 역할을 열심히만 해냈을 뿐이었다. 정신치료 과정에서야 내 결핍을 이해하고 건강한 아버지 상像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처럼 내면의 결핍으로 인해 마음의 눈이 가려지면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그러니 뭐든 일의 본질은 비켜나 스스로 만든 변두리를 서성인다. 여기에 더해 성실한 나를 몰라 준다는 원망의 마음이 쌓이면 갈등으로 번진다. 일의 정의를 단순히 직장 내 업무를 떠나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갖는 내 위치와 역할로 확대시켜 보면 더 복잡해진다. 직장 내 업무야 이성이 앞설 테지만 사람 사이 대인관계는 감정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 세상 제일 어려운 일이 사람노릇이라 하겠는가.
사람노릇을 잘한다는 것도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결국, 현실을 왜곡시키는 장막에 둘러싸여 막연한 기대로 살아갈지, 장막을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할 것인지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