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종로의 J컴퍼니는 뒤로하고.
두 번째 회사는 집에서 20분 거리의 카드 단말기 회사다.
J컴퍼니 퇴사 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6개월을 쉬었다. 맞추려고 맞춘 건 아니었다. 원래 얼마나 쉴지 생각조차 딱히 하지 않았다. 그저 벌어놓은 돈을 까먹으며 생활하다 조급해져 직장을 구했던 거 같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이 회사 첫 면접에서 합격한 나는 다른 회사는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입사했다.
소기업을 다니다 중소다운 중소에 입사하게 되어 좋았다. 건물도 깨끗하고 좋고 사무실도 사무실다웠다. 회사 규모도 딱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처음 맡았던 업무는 영업지원이었다.
정산, 영업직 지원 업무, 고객 응대, 계약서 관리 등.
사수는 전임자 퇴사 후 몇 개월 동안 2인분의 업무를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내가 입사했고, 그녀는 여전히 2인분의 몫을 해야 했다.
회사 내엔 당연히 여러 팀이 있지만 팀과의 교류가 있는 회사는 아니었다.
약 10명의 팀원이 쉴 새 없이 전화를 받는 팀이 있었다. 6개월 내내 파티션 너머 옆 자리에 있었는데 그 팀이 그렇게 전화를 많이 받는지 몰랐다.
내 관심사는 그들이 업무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어떤 내용인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약 10명의 팀원들이 얼마나 친밀한지, 즐거워 보이는지가 중요했다.
우리 팀에서 적응하지 못한 나는 뱉어지듯 ‘옆 팀’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개인당 하루에 약 50통의 전화를 받는 게 오바가 아닌 그 팀으로.
‘옆 팀’이었던 우리 팀 내에서 여론이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업무를 못하는 직원이 유배당하는 듯 오는 게 우리 팀이라니. 이런 잡스러운 구설수는 집어치우고.
새로운 ‘우리 팀’은 무조건 ‘빨리 빨리’가 중요했다. 메모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런 게 통하지 않는 팀이었다.
남 업무 따위에 관심 없었을 땐 전혀 몰랐다. 이렇게 업무가 쏟아지고, 정신없고, 전화가 이렇게까지 많이 오는지 몰랐다.
우리 팀 팀원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당일 개통을 하지 못하면 퇴근은 없었다. 정시 퇴근만을 위해 우리는 달렸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화장실도 참으며 각자의 공장을 풀가동시켰다. 그러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회사에 머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전화 어찌나 많이 걸려오는지, 내용의 난이도가 낮긴 했지만 진상에 잘못 걸리는 날엔 모든 게 꼬였다.
우리 팀의 모습은 마치… 걸려온 전화에 형식으로 답하며 개통 문항을 입력하는 로봇 같았다.
첫 회사가 어린 사회초년생 직원들을 착취해 운영하는 곳이었다면 두 번째 회사의 우리 팀은 여자 직원들을 싼 값에 갈아서 쓰는 곳이었다.
학력, 나이, 경력 무관. 어느 것도 필요 없는, 단순 업무. 이 업무를 못하는 사람을 없을 거다(놀랍게도 후임 중에 있긴 했다). 그저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물경력 중에 물경력.
두 번째 회사는 현 회사까지 합해 4개의 회사와 아르바이트 경력을 합쳐 가장 오래 다닌 곳이다.
J컴퍼니가 워낙 막장 소기업이라 복지라고는 눈을 뜨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두 번째 회사는 딱 기본은 했다. 친한 동료 직원들이 복지에 관련해 회사 욕을 할 때 형식적인 동의를 내보이긴 했으나 이 정도면 괜찮다는 게 속마음이었다.
무난한 회사 복지와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 덕에 회사 생활이 즐겁긴 했지만 업무에서 몰려오는 지겨움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말, 걱정하는 말, 미래에 대한 불안함, 이젠 마냥 어리지 않은 나이.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단 하나. 내가 더 단 하루도 이 곳에 있고 싶지 않을 만큼 지겨워졌다는 거.
J컴퍼니 퇴사는 후회한 적이 없다. 하지만 개통 공장 퇴사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세 번째 회사는 만나지 말아야 할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