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하고 싶어. 다시,
여행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찰나 들긴 했지만,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지. 푸하하하.
오롯이 나만을 위해, 나를 찾기 위해 내가 모처럼 준비한 선물 같은 여행인걸?
열심히 달리고 달려 김포공항에 조금 여유 있게 도착해 모든 수속을 마쳤고, 비행기 창가자리에 앉아서야 하루 중 처음으로 여유를 느꼈다. 후 정말 쉽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오늘 하루가 마치 나의 지난 3개월 취준생활같이 느껴졌다.
용감하지만 무식하게 던진 사표 이후엔 훨씬 나은 무언가가 있을 거라 막연하게 희망했다. 용기를 낸 만큼 세상이, 온 우주가 조금은 날 도와주지 않을까.
하지만 차가운 현실에 무능력한 나 자신이, 버티지 못하고 퇴사를 해버린 나 자신이, 하루하루 자기 통제를 잃고 편안함에 타협하고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싫어졌다.
그럴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친했던 친구들의 연락이 부담스러워졌고, 가족들의 걱정의 눈빛과 한마디는 자격지심이라는 자체필터가 써져 짜증스러운 표정과 퉁명스러운 대답만을 하게 되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더욱 열정적으로 가만히 있고 싶고, 때로는 치우기도, 씻기도, 뭘 해먹기도 귀찮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바뀌는 거 없잖아. 어차피 지금 상황은 똑같잖아.
세상의 모든 부정이 나의 작은 몸을 모두 휩싸고 돌 때쯤, 제주로 잠깐 도피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멀어질 때쯤이었을까? 창 밖을 내려다보니 파란 것은 바다 혹은 하늘, 초록초록한 것은 산과 숲뿐이었다.
사람은 너무 작아 보이지 않을 정도. 너무 크고 무거운 나머지 하루하루 버거웠던 나의 걱정과 부담, 스트레스는 먼지와도 같을 정도로.
이후 선물같이 여유와 감사가 찾아왔다.
문제없이 비행기에 탑승했음에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도 공항에 잘 도착했는지 놓고 간 것은 없는지 컨디션은 괜찮은지 걱정해 주고 잘 다녀오라고 해주는 가족들에게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무너져가는 나의 옆에서 토닥여주고 함께해 주는 남자친구에게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도피일지라도 나아지고자 제주행을 결정한 나에게 감사합니다.
버티고 지켜내는 삶은 모두 고귀하다. 오래된 역사와 건축물이 그러하듯,
가정을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지키기 위해 당연하지 않지만 당연하게 희생하는 모든 인생들이, 포기하고 싶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책임감으로 버티고 지키는 저마다의 인생들이 존경스럽고 참으로 소중하다.
지금 당장 내가 쏟는 노력과 시간들이, 열심히 제출하지만 불합격하는 시험과 이력서들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한없이 작아졌지만, 버티고 지킨다면 그 자체로 소중하고 언젠가는 빛을 볼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열심히 해보자. 새로 해보고 싶어졌어.
그렇게 나 자신과 쉴 틈 없이 대화하며 어느샌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요가도 하고 맛난 것도 먹는 천방지축 제주 여행기 ST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