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관행 08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옂 Aug 24. 2024

관행, 감자 많이 먹어라

청주를 가야지 싶었다. 이틀 만에 비가 완전히 그쳤다. 적어도 강원도는 말이다. 아직도 청주는 비가 내린다고 했다. 아침 공기가 선선했다.

꼭 겨울이 찾아오기 직전의 가을 아침 같았다. 시원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져 가방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걸었다. 푸석하게 말린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풍겨왔다.

길을 걷다가 오래된 차를 손으로 꼼꼼하게 세차하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적어도 삼십 년은 돼 보이는 코란도를 물을 뿌려가면서 닦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문득 어른스럽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봤다. 어른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른스러운 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이다.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다. 음, 저는 독서를 취미로 갖고 있고요. 건강식을 즐겨합니다. 돈이 많아서 새콤달콤을 네 개씩 사 먹을 수 있어요. 하나도 어른이 아니다. 내 것을 지키고 소중히 다룰 줄 아는 게 어른이다. 우린 하나도 완벽하지 않다. 다 그런 척할 뿐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게 불완전한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주며 아끼는 것이, 그렇게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 어른인 듯싶었다. 난 어떤 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이번 여행을 떠났고.

세차하는 할아버지 보고 든 생각이다.

강원도에서 한 번에 청주를 가는 기차표가 없었다. 동선 한 번 참 못 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갈아타기로 했다. 어제와 달리 실수 한 번 없이 기차를 타올랐다. 앞 좌석 사람이 의자를 끝까지 뒤로 젖혔다. 또 화가 났다. 어떡할까. 의자를 주먹으로 칠까.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네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혹은 문화일 수도 있지 않는가. ITX에서는 의자를 뒤로 젖혀 뒷사람 무릎연골을 깨부수는 문화가 있을까 싶어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문화가 없을 수도 있어 내 의자를 젖히진 않았다.

아마도 한동안 타지 않을 기차에서의 시간들을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며 마지막 기억을 새겼다. 정말 오랜만에 온 청주는 그대로였다. 점심을 먹고 백화점에 갔다. 가봤자 매번 커피나 마시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다. 더현대 서울 고객 평균 지출 금액이 이만 원이라더라. 우리도 비슷했다.

시집을 두 권 샀다. 욕심인 걸 알지만 그래도 사놓으면 읽으니까.. 마음먹고 시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아는 시인이라곤 윤동주와 이육사뿐이다.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이 전부다. 나의 무지함에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사실상 여행을 끝내버린 오늘은 여독을 푸는 날 같았다. 패키지여행 마지막에 끼워져 있는 옥장판이나 녹용 코스같이..

자취방 말고 진짜 내 방을 둘러봤다. 임시거처 말고 내가 커왔던 그 방 말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우리 집을 걸어봤다. 괜스레 창문을 열어서 도롯가도 구경했다. 쓸데없이 노래도 불렀다. 괜히 엄마한테 말도 걸었다. 마음 하나 둘 곳 없어서 떠났던 여행지의 종착역은 내 가족이었다. 우리나라를 한 바퀴나 돌고 나서야 알았다.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볼 것도 없는 동네를 걸었다. 중학생 때 입던 잠옷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못날 것도 없다. 관행보다 못난 게 어디 있을까. 어두운 나머지 우리 동네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맥주를 사러 갔다. 의도치 않은 전통을 이어가는 기분이었다. 혹시 몰라 신분증을 챙겼다. 택도 없었다.

생각이 많으면 사람은 약해진다. 난 생각이 너무 많아 밤엔 잠도 잘 못 잔다. 한없이 약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을 지경이었다.

ITX 창가 자리에 앉아 정처 없이 떠돌다 이만하면 마음 정리 다 됐다 싶어 내렸고, 일기 좀 쓰면 더 도움이 된다길래 끝도 없이 길게 써버린 게 이번 여행의 거의 전부이다. 이게 무슨 꼴이냐는 물음에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다고 답했고, 꾸역꾸역 버티다가 결국 터져버렸던 게 오 월 아침.

깨진 유리를 잡으면 손이 다친다. 감당하기로 했다면 받을 상처까지 각오하고 유리를 잡는다.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선택임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 손이 다 찢어져도 꼭 잡아야만 한다는 마음이 딱 지금인 오 월 저녁. 그런 봄밤을 보냈다.

유튜브 재생목록에 마흔여덟 곡이 될 때까지 가만히 노래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싸구려 모텔방 같았던 정적 동안 내 방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난 또 얼마나 약해졌을까.

이전 07화 관행, 비록 무의미할 것 같을지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