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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관행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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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옂 Aug 21. 2024

관행, 경험의 부재 또한 경험

오늘은 아침 일정이 있었다. ‘오늘은’이라고 시작하니까 진짜 일기 쓰는 것 같네. 아침부터 무슨 페스티벌을 가기로 했다. 일러스타 페스인가 하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인데, 최근에 갔던 북페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오픈이 열 시인데 여덟 시 반부터 줄을 서야 된단다. 잘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슈프림 오픈런 때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니 단번에 이해가 됐다. 다양한 경험은 꼭 그 경험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값진 가치인 듯싶었다.

우리나라에서 오타쿠 문화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문화를 그래도, 마음먹고 보게 된다면 조금은 재미있을 줄 알았다. 그 유명한 슬램덩크도 짱구도 전부 애니메이션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다. 사실은 걱정보단 기대가 훨씬 컸다. 혹시 모른다. 내가 2D 미소녀가 취향일 수도 있지 않나.

방금 한 말은 전부 취소다. 관심도 없는 애니메이션을 일곱 시간이나 보고 있자니 정신이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봐도 봐도 똑같은 것 같은 그림의 미소녀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못해도 삼천 명은 온 것 같았다. 이런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많을 수 있나 싶었다. 굿즈를 사겠다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모습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코스프레가 정말 가관이었는데,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찔함이.. 그만 적어야겠다. 상상하기도 싫다.

일곱 시간짜리 문화충격을 받은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냅다 잠이나 잤다. 인스타그램도 유튜브도 볼 수 없었다. 이틀 째 큰아빠네 집에 얹혀서 잔뜩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감사했다. 두 시간을 조금 더 잔 것 같았다. 창 밖에는 끝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행.. 중에 있는 나는 집에서 책이나 읽었다. 두 시간을 넘게 잔 나머지 몸이 늘어져버렸다. ‘혼자 하는 여행 중 남의 집에서 낮잠 잔 다음 책을 읽으며 시간 보내기’는 점점 여행이라고 부르기에 힘들 정도도 아닌, 고즈넉한 방학 같았다. 본가에도 자취방에도 소파가 없어서 소파의 편안함을 잊고 살았는데,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순간 소파가 없는, 소파를 들일 수도 없는 나의 자취가 불쌍해졌다. 꼭 다음 자취엔 일인용 소파를 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을 한 순간이었다.

저녁으로 소고기를 먹었다. 소고기! 혼자서 내일로 여행을 하는 나에겐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음식이다. 소나기나 소고도 아니고 소고기는.. 미국산 등심이라고 별 거 아니라고 했는데, 소고기는 절대 별 게 아닐 수 없었다. 눈물이 날 만큼 맛있었다.

밥을 먹고 손톱을 잘랐다. 정확하게는 손톱을 갈았다. 손톱을 가는 기계가 있길래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획기적인 발명품인 척하는 광고만 여러 번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매번 궁금했었다. 열 손톱을 다 가는 데 오 분이 넘게 걸렸다. 하나 가는 데만 한나절이 걸린 그 기계는 아무도 안 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의를 듣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말 불현듯 떠올랐다. 학기 중이지.. 급하게 강의를 듣고, 내일까지인 과제를 열심히 적어냈다. 영상 시청 과제였는데, 매일 같이 이천 자 가까이 되는 일기를 쓰는 나에겐 일도 아니었다.

사실 꽤 오래 걸렸다. 쓰고 싶어서 쓰는 글과 관심도 없는 영상 감상문의 차이는 ‘글’이라는 본질적인 요소만 같을 뿐이지 온전히 다른 것이었다. 하나는 취미, 다른 하나는.. 고문

내일은 뭘 할지 고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음날 할 일을 생각해 두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여독이 잔뜩 쌓였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제주에 있기 싫어서 떠난 여행인데, 어디에도 있기 싫었다. 이게 뭐람.

최근 들어 자존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임을 깨닫는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좋은 사람보다도 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단어임을 깨닫는다. 최근 들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나는 오히려 못난 사람인 듯 싶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으면 날 좀 더 좋아해 주지 그랬나. 나 자신이 싫어지는 요즈음이다.

일주일짜리 여행도 똑바로 못 마치는 내 모습이 꼴 보기 싫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청주로 가는 차편이 한 대도 없었다. 기차도 마찬가지였다. 기차 패스를 끊어놓고선 쓰지도 못하고 있었다. 새벽 대여섯 시가 아니면 전부 매진이었다. 연휴 마지막날인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듯싶었다. 걸어서 가야 될 판이었다. 갈 수 있는 곳을 알아봤다.

춘천을 갈 수 있었다. 그래 춘천도 좋지, 그 자리에서 춘천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이것도 망설이다가 매진될 것 같았다.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이번 여행에서 강원도까지 다녀올 수 있다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한소리를 들었다. 무슨 여행이 이러냐고. 가봤자 시가지나 가는 게 여행이냐고, 지역을 가본 것 말고는 의미가 있냐고, 가면 관광지나 좀 보라고. 광주까지 가서 역사와 전통이 가득한 거긴 왜  안 갔는지, 전주는 뭐가 유명하고, 춘천을 가면 남이섬을 꼭 가야 된다는 류의 한소리였다. 물론 여행 가놓고서 일기나 쓰고 오는 모습이 안타까울 수 있었다.

또 나의 여행에 변명을 할 생각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행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다 필요 없었다. 보여주려고 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멋진 관광지를 보러 가는 것도 아니다. 사실 여행을 온 것도 아니다. 깨지지 않을 관행을 깨부수고 있었다. 난 내일도 춘천에서 책이나 읽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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