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관행 0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옂 Aug 21. 2024

관행, 빈집

아빠가 날 깨웠다. 휴대폰이 아닌 사람이 날 깨워준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지난 몇 년간 날 깨웠던 건 기상나팔과 휴대폰 알람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내게 일산을 가자길래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장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든 좋았다.

몇 년 만에 일산에 가서 한 일이라곤 캐치볼과 보드게임뿐이었다. 참으로 이번 여행 같았던 일산에서의 순간들은 다른 방면으로 본질을 잃지 않은 듯싶었다.

보드게임카페에서는 ‘카탄’이라는 게임을 했는데 왜 이런 것까지 적느냐면, 충격적으로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전략 교역 게임이라길래 별로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게임이 끝나고 나니 네 시간을 넘게 앉아있었더라. 게임중독자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너무 재미있었다. 그냥 일기에 으레 쓰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 나와 카탄을 함께 해준다면 보드게임카페비도 전부 내줄 수 있다. 정말이다.

무인 빨래방에 갔다. 일주일이 넘는 여행에 사흘 치만 챙겨 온 탓에 나흘이 된 날엔 꼭 가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빨래는 순식간에 일정이 되어버렸다.

건조기까지 구천오백 원이나 내고선 빨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할 게 없어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는데, 자꾸만 여행지에서 맥주를 마시는 게 습관처럼 굳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별로 유의미한 습관은 아니다. 굳든 말든..

일산의 라페스타를 쭉 걸어봤다. 낭만포차거리만큼 사람이 많았던 밤 시간대의 라페스타는 오늘 밤 누구라도 꼬시겠다는 마음가짐을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 양말도 없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나는, 그 거리에서 아마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내 바로 옆을 지나가던 남자는 이 날씨에도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내가 입고 있던 나이키 반바지는 정가품 여부도 모른 채로 육 년째 입고 있다.

사랑과 헌팅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서 고민했던 순간이었다. 술 먹고 어떻게 해보겠다는 내 앞에 있는 못난 사람들이나, 지금까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수년간 고민해 온 나나 다를 게 없다고 느꼈다. 아마도 못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나일 것이다.

물론 단편적인 판단이었겠지, 당연히 우리들의 사랑에는 관계를 통한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경험, 성장이나 가르침들도 있다는 걸 안다. 더 나아가서 서로를 위한 마음으로 개개인의 합보다 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곤 슬리퍼를 직직 끌면서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벌써 며칠 째 입은 깔깔이에는 팔꿈치 근처에 거뭇거뭇한 때가 묻어 있었다. 말리지 않은 머리는 아직 뒤통수가 젖어 있었고 두 손엔 건조기까지 돌려 뽀송뽀송한 빨래가 들려 있었다.

이전 04화 관행, 티 없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