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오늘 새벽까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그대로였다. 흐리기만 하다는 아이폰의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쉴 새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늘은 무너질 듯했고, 이틀 연속으로 내리는 비 탓에 기온은 순식간에 쌀쌀해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나왔다. 이틀이나 신세를 져 놓고선 용돈까지 받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부담 없이 용돈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청춘청춘거리는 스물네 살짜리 대학생은 가진 게 젊음밖에 없어서, 젊은 게 벼슬이라도 되는 것 마냥 떠벌리고 다닌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까지 가야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승차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하철 탑승구와 기차 승차홈은 분명히 다르게 생겼다. 지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청량리역을 네 바퀴나 돌아봐도 지하철 탑승구에서 기차를 타야 했다. 다섯 바퀴째 살펴볼 때는 하도 모르겠어서 기차를 못 타면 지하철을 타고 갈 생각이었다. 심지어 실수로 개찰구에 카드를 한 번 찍어버려서 아까운 천사백 원을 날려버렸다. 멍청비용.. 어쩔 수 없었다. 난 멍청하니까
놀라운 일이었다. 지하철 탑승구에 기차가 도착한 것이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나는 몇 번 열차인지도 모르고 냅다 타버렸다. 역이 설명하던 곳이 맞았던 것이다. 텅텅 비어야 하는 ITX는 웬일로 만석이었다. 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이어폰을 꽂았다. 춘천은 종점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이 잘 수 있었다. 지하철도 아닌 기차에서 역을 놓쳐버리면 큰일이다.
비가 그칠 줄 알았던 오후조차도 비가 내렸다. 춘천역에서 내리자마자 본 풍경은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순식간에 피곤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비가 내릴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리는 비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친구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며 우산을 펼쳤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조금이라도 누웠다가는 그대로 누워서 잘 것 같았다. 원래 비가 오는 날은 더 그렇다. 빨리 나가야 했다. 치킨을 먹고 싶었다. 닭강정을 먹으러 가야겠다. 낮시간엔 문을 여는 치킨집도 없을뿐더러 여수에서 반이나 남긴 치킨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걸어봐도 닭강정을 파는 곳이 없었다. 쌀국수나 백반집은 있어도 닭강정은 없었다. 난 닭고기가 먹고 싶었다. 지도를 켰다. 가장 가까운 닭강정집을 검색해 봤다. 이십 분이나 걸렸다. 벌써 십 분이나 걸은 참이다. 맘스터치가 떠올랐다. 칠 분이 걸린단다. 어쩔 수 없다. 프랜차이즈는 그만 가기로 했건만..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지하상가로 가야겠다 싶었다. 이게 웬걸, 지하상가에 맘스터치가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가게를 발견했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하는데 사십 퍼센트에서 갑자기 백 퍼센트가 된 기분이었다. 신나게 들어갔다. 인크레더블 버거 세트로 하나 주세요. 네, 먹고 갈게요.
부른 배를 두들기면서 산책도 할 겸 근처 미술관으로 갔다. 이름이 춘천미술관이었는데 지역명을 딴 미술관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름값은 할 것 같았다. 블로그 리뷰가 한 개였다. 한 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가지 말까 하면서 걷다 보니까 미술관 앞 신호등이었다. 미술관은 십오 초 만에 보고 나올 만큼 작았다. 입장료를 천 원이라도 받았더라면 나는 화가 치밀어올라 정수기에서 물을 이 리터는 뽑아마셨을 것이다. 다행히도 입장료는 없었다.
가까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일기를 적었다.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내가 여행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카페에 가서 앉아있기인 것 같다. 일기를 쓰든 책을 읽든 그냥 핸드폰을 하든 가장 편안한 시간이다. 제주도에서도 혼자 카페를 다녀볼까 싶었다.
밥도 먹었다 커피도 마셨다, 이제 뭘 할까. 근처 시내를 구경 갔다. 춘천의 시내는 참으로 작았다. 춘천시민들에겐 미안하지만 안쓰러울 노릇이었다. 너무 작았다. 서울 사람들이 지방을 보면 느끼는 감정이겠구나 싶었다. 사실 청주나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하잘것없이 작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다.
아무리 그래도 닭갈비의 도시니까 닭갈비집이 좀 있겠지 싶었다. 조금이 아니었다. 가게가 두 개 있으면 그중 하나는 닭갈비집이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닭갈비집이고, 심지어 닭갈비거리까지 있었다. 무서울 만큼이나 많았다. 닭갈비에 목숨을 건 도시..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노래방을 가고 싶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별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만들어보자면 점심에 먹은 햄버거가 아직 소화가 덜 됐다. 최근에 친구에게 노래방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부끄럽다. 노래도 잘 못 한다. 부끄러울 것도 쌨다. 사십 분을 부르고 나왔다.
저녁은 닭갈비를 먹어야겠다. 그렇게 많은 닭갈비집이 있는데 안 먹어볼 수가 없었다. 삼삼오오 모인 식당에서 일 인분만 시키기가 뭐 했다. 사실 상관은 없었겠지만 괜히 머쓱했다. 닭갈비를 시켜 먹었다. 닭갈비 맛이 거기서 거기지, 별 다른 맛은 없었다. 대신 양이 많았다. 관광상품을 양으로 승부 보는 건.. 처음 봤다.
걸어서 사십 분이나 걸리는 거리에 하천이 있었다. 버스는 없었다. 춘천의 절망적인 버스 시스템을 원망했다. 춘천에서 한 게 많이 없어서 밤 시간이라도 알차게 써보자 싶었다. 비가 오는 연휴의 마지막 밤의 공지천엔 아무도 없었다. 이적의 빨래를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어떤 노래들은 듣기만 해도 특정 시기들이 떠오르곤 한다. 자주 들었던 시기일 것이다. 노래로 시기를 떠올리는 것. 참으로 멋진 일이다. 아마도 빨래 또한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아무리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이라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시간들이니. 사실 빨래 같은 노래는 일기에 적기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다. 어차피 이 글 아무도 안 읽는다. 나의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적어봤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한 시간 반을 걸었다. 밤 열두 시의 춘천은 고즈넉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춘천에서의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