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일간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여행 같지도 않은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내 방은 그대로였다. 임시거처 같은 그 방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본 광경이 퍽 익숙해 정이 들었구나 싶었다. 좁아터진 아라동 쪽방이 그리워질 날이 올 땐 무슨 추억으로 그리워할까 궁금한 순간이었다.
짐짝 같은 가방을 풀었다. 두 번씩 입었던 사흘 치 옷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충전기도 꺼내고 양말도 꺼냈다. 입고 있던 옷들도 벗어 하나둘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 여행 전날 팔에 생겼던 멍 같은 상처는 오늘에서야 사라졌다. 하도 빨개서 지워지지도 않을 것 같던 게 지금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언제 생겼는지 언제 낫는지 알아차리기도 쉽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제주는 오히려 더 추워진 듯싶었다. 끝난 것만 같은 봄이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절기상 입하를 지나버린 오늘은 엄연히 여름이다. 이렇게 추워 놓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더워질 날씨를 이젠 안다.
유독 짧았던 올해의 봄은 마치 주정뱅이 같았다. 술 한 방울 없이 말이다. 사랑을 말할 때, 혹은 떠올릴 때 비틀거리면서 똑바로 말도 못 하고 지새운 밤들만 모아도 몇 날 며칠은 충분할 것이다. 코가 찡해진다. 지나가면 아련해지는 것에 대해서, 비례하지 않는 기억과 시간의 상관관계 사이에서 언제 올지 모를 그때를 기다리며 눈을 꼭 감는다.
우산이 없어 아무도 없는 정자 안에 들어가 앉아 노래를 불렀던 광주, 오갈 데 없는 벤치에서 맥주를 마셨던 여수, 해가 쨍쨍해 걷다 지쳐 포기한 전주, 배불리 먹고 왁자지껄 시끄러웠던 충주와 일산, 작고 촌스러웠던 춘천과 편하다 못해 눌러 붙고 싶었던 청주.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해왔던 사색과 자기혐오. 하나의 아카이브가 되어줄 글로서의 관행.
광주에서 탄 버스였나, 전주를 가는 기차였나 기억은 나질 않는데 내 옆에 내가 있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냥 문득, 새삼스럽게. 내가 앉아주는 건지, 내 옆에 앉아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 옆에서 내가 얌전히 앉아 같이 밤을 새워줬으면 싶었다.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는 것처럼 고요하게.
가끔은 혼자 그런 질문을 한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인가. 넌 사랑이었을까. 사랑이라고 외치면 그게 사랑이 되는 걸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은 보통 사랑 혹은 미움의 감정에 가깝다. 혹은 둘 다거나. 억지로 결론을 끄집어내서 구별한 다음에 마음속 서랍에 집어넣고 싶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미움인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보통의 질문이 그렇듯 언젠간 해답을 찾겠기로 하는 마음으로.
그럼 마찬가지로, 정리되지 않을 마음을 꼭 정리할 필요가 있을까. 언젠간 정리가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버려 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잔뜩 어지럽혀진 내 방에서 나는 내 물건이 어디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오히려 엄마가 정리해 주면 모르는 것처럼, 정리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내 방의 물건처럼, 마음 또한 마찬가지지 싶었다.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운 대로 살기로 했다. 누가 정리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를 찾는 여행이라고 했으면서 나를 찾기는커녕 여행 중간엔 질문조차 잃어버렸다. 어차피 우연에 의해 좌우될 세상에 그런 질문이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다만 확실한 건 우연이든 필연이든 찾아온 인연과 도래한 결말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슬퍼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마음껏 슬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번 관행처럼 말이다. 찰나를 이어 붙이면 영원이 된다는 말처럼, 영원하길 바라는 순간들을 이어 붙이면 영원이 된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런 찰나의 순간들을 새기고자 한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벽에 새겼던 어쭙잖은 표현도.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를 질문도. 어설픈 새드엔딩도. 그 느낌 그대로. 내 마음속에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