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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관행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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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옂 Aug 26. 2024

관행, 추신

한 편의 시집이 되어주고 싶던 나는 너에게 습작만도 못한 산문집이 되어버렸다. 반듯하게 접어서 책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이면지처럼 버려진 나는 결국엔 반대쪽에서 구겨진 채로 그곳에 머물러 있다. 끝끝내 마주하지 못한 우리의 마음은 지나간 자리에 미련만 남아있을 뿐이다.


너를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날엔 혹시 내가 너를 잊었나 싶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어림도 없는, 더 큰 마음만 쏟아져 온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아도 할 수 있는 말은 없어서 언제가 될지 모를 멀지 않을 미래에 하려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했던 그 말들은 이젠 어디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하릴없이 마음속 저편에 묻어둔다.


친구라도 될 걸 그랬다는 유명 가수의 말처럼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정의 내리기 급급한 나머지 친구라는 정의만 내렸을 뿐 친구는 아닌 우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고 뭐라고 내릴 정의는 없어서 친구라는 단어만 갖다 붙인 꼴이 우습다고. 옛사랑이라기엔 아직도 널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고, 사랑이라기엔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할 수 없는 사이다. 과연 너와 내가, 우리라는 단어로 부를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이다.


비극도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처럼 겉보기엔 뻔했고 평범했다. 햇볕이 눈이 부시게 밝았던 날 보러 갔던 바닷가도, 서로에게 또 편지를 써주자는 약속도, 영원한 이별을 고했던 도서관도 전부 다 그저 그런 영화 속 한 장면 같았으니까. 그러나 몇 번씩이나 맞이한 이별 중 끝나지 못한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가끔 숨겨져 있던 우리만 알 수 있던 장치들을 확인할 땐, 간신히 추스려 쌓아 올린 마음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우리만 아는 노래의 제목이 새로운 사람에게서 들려온다.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기에 몰려오는 슬픔을 혼자서 삼킨다. 집에 돌아와 혼자선 일기장에나 적어본다. 적어 내리기도 힘든 너의 이름 세 글자 옆에 오늘 들은 노래도 조심스레 보탠다. 우리의 기억 위에 또 새로운 걸 덮겠지만 꽤 오래 걸릴 것이다.


넌 사랑이었을까-라는 질문엔 사랑이 아니면 뭐냐고 할 수는 있어도, 난 사랑이었냐는 질문엔 대답할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우리 좋았잖아’가 아닌, 사실은 내게 한 번도 진심인 적이 없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끔은 분위기에 취해 사랑이라고 착각했을 수는 있지만 사실 그건 진짜 마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린아이가 부모님에게 혼이 날 땐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진심을 다해 자신도 모르는 거짓말을 내뱉는 것처럼. 그리고 그 진심이었던 거짓에 부모님은 속는 것처럼.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돌아보며 한순간이라도 진심인 적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반면, 나는 무얼 그렇게 사랑했을까. 어떤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갔을까. 무슨 거짓말이 그렇게 감쪽같았을까. 난 너한테 끝끝내 한 번도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몰랐지만 난 한 번도 사랑이 아닌 적이 없었으니까.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돌아갈 수도 없는 그 시절을 사랑으로 기억해야겠구나 싶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비참했던 시간들 속으로 기어들어 간 다음, 좋았던 추억만 한 움큼 긁어모아 그 추억들만 돌이켜보고 아끼며 다시 슬퍼할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좋았던 순간들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소중할지도 모른다. 모순 같은 생각과 행동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테고. 또 사랑에 논리를 갖다 붙이는 게 우습긴 하다.


봄은 늘 그렇듯 너무 짧았고 가끔은 여우비가 내리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비가 내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너를 써 내려갔다. 조금은 감정이 과잉될 때가 있었지만, 아니 사실 많았지만, 정말 솔직히 매번 그랬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그리고 씩씩하게 너를 썼다. 너 없이도 살아가야 했기에. 또 이런 사랑을, 백지장 같은 마음을, 영원과 같은 찰나를, 이제는 뚜렷해져 버린 완벽한 새드엔딩을 다시는 겪을 수 없기에.


언젠가 널 추억으로 부를 때, 오지 않을 그 먼 미래에 널 떠올릴 때 그래도 웃으면서 기억할 수 있게.


온몸을 다해 마음을 쓰고 몸이 부서져라 널 사랑했다. 다 부서져 버린 사랑의 끝에 들었던 너의 너무 너무 고마웠다는 말. 흐려지기는 할까 싶은 마지막 인사에, 사실 못 한 말이 있는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고마웠다고. 사랑해 줘서 고마웠고, 잊지 못할 추억들 만들어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언제라도 돌아오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미안해 끝까지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아서


이젠 진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 싶어

잘 자. 꿈도 꾸지 말고 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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