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담 소담 IV
캐나다의 자연환경은 좋은데 의료는?
외국에서 살아본 것은 유학 갔던 독일이 처음이라 외국 하면 독일에서의 삶이 나도 모르게 기준처럼 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의료는 무료이고 빠르게 진료받을 수 있었고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사들, 그곳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다.
심지어 금요일 오후에 위가 아팠는데 주치의 진료가 끝난 시간인데도 전화를 걸었다.
의사는 자기가 집에서 갈 테니 빨리 오라 해서 진료를 받았던 적도 있었다. 금발머리 뚱뚱한 아줌마였는데 참 고마웠다!
전문의 진료도 며칠 기다리면 된다.
독일은 직업을 "Beruf"라 하는데 하늘이 불렀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경향이 보였다.
거주지는 콘크리트로 된 기숙사지만 6년 사는 동안 망가져서 수리한 적이 없이 튼튼했다. 학교등록금은 아주 조금 냈다.
이런 게 나도 모르게 기준이 되어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 90년 초 우리나라 개인병원은 좀 지저분했고 대학병원은 환자가 한 명 진료를 받는 동안 다음 환자가 들어와서 기다리면서 앞 환자의 병에 대해 다 듣는다는 게 너무 싫었다.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환자의 권리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러는 대학병원이 있다.
다행인 것은 지금은 앞 환자의 소리는 안 들린다는 것이다
캐나다에 간 것은 그 후 십 년 후인데 그사이에 우리나라가 발전을 해서 주변 자연환경을 빼면 우리나라보다 그리 좋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자연환경이 어딘데 그러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사실 주말마다 연휴마다 아들을 구경시키러 돌아다니긴 했다.
캐나다에서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예방접종을 했는데 의사가 주사를 놨다. 다음날 보니 아들 팔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아들이 "엄마! 내 팔 좀 봐!"
아니 의사가!
사실 독일에서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두 나라 사람 다 대체로 손재주가 없다.
의료비는 무료였고 주치의 진료는 그다지 기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문의 진료는 많이 기다리고 검사는 더 더 많이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궁암검진 시기가 다가와 병원에 갔다. 검사를 받고 결과가 언제 나오는지를 물었더니 한 달 걸린다고 했다. 그때 우리나라는 3,4일이면 나오는데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한 달을 기다리고 병원에 갔다.
의사의 말이 세포수가 부족해서 결과가 안 나왔다고 다시 샘플채취를 해야 한다고 솔을 집어 들었다. 아니 솔로 긁는다고....
어이도 없고 화가 났다.
그럼 중간에 연락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아무 말없었다. 일손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캐나다 의료는 아직도 무료지만 그 기다림의 철학은 잊을 수가 없다.
급한 환자는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응급실이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적응이 필요할 것이다.
캐나다 하면 잊을 수 없는 또 한 가지가 청설모다.
우리나라 다람쥐보다 많이 크다. 털도 길다.
우리가 살던 기숙사는 나무로 된 하얀 집이었다.
한국에서 사진으로 봤을 때는 예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살던 곳은 밴쿠버 해안가라 가끔 태풍이 와서 밤새 바람이 부는 날이 있었다.
그럼 우리 집이 3층이었는데 그 바람을 못 이기고 처마밑 나무판이 날아가 버렸다.
청설모가 이 속으로 한번 들어오더니 날마다 와서 우리 집 천장 속을 달리다 나무를 갉아먹었다.
관리실에 수리를 요청했지만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수리를 해주고 갔지만 바람이 불자 또 날아갔고 청설모는 또 들어와 달리다가 천장나무를 갉아먹었다. 그래서 청설모가 보이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느 날 아들방 천장을 보니 비가 새어 젖어들었다.
관리실에 또 달려갔다. 그들은 얼른 오지 않았고 아들방의 천장은 썩기 시작했다. 조금 썩었는데도 방에 곰팡내가 진동을 했다.
캐나다에서의 삶은 모든 분야가 많이 기다려야 한다. 차수리를 맡겨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했다.
끝나면 전화한다며 열흘이나 있다 전화가 왔다.
사람들이 많이 느리고 빠를 필요를 전혀 못 느낀다!
빨리 일하는 사람이 손해인 것 같은 분위기다.
거기에 맞출 수없으면 살기 힘들다.
속병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