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게 미덕이다.", "양보가 미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는 "시장에 가거든 예쁘고 좋은 거 사려고 하지 마라. 그냥 사라. 큰 것도 작은 것도 그걸 키운 사람 마음은 다 같은 거다. 그거 좀 크고 좋은 거 먹겠다고 고르고 그러지 말아라."라고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그러셨듯 저의 아버지도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키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들은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부모님도 늘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양보하라고, 네가 참으라고, 남에게 해끼치지 말고 살라고요.
지금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어째서 그 말씀이 옳은 말씀이신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았지만,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렸습니다.
그저 양보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남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되고 그러면 나쁜 사람이라는걸(무섭게 혼난다는걸) 배웠을 뿐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양보하기 싫을 때가 있고, 참기 싫을 때도 있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싶을 만큼 분노를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마음이 괜찮다는 것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말로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을 인정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그저 어른들이 보기에 좋은 또래보다 성숙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불만스러운 나는 억누르고,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사랑이라고 배운 방법들을 실천하면서요.
아무리 좋고 훌륭한 것도 "억지로"라는 강제성이 생기면 저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억지로"에는 그걸 하기 싫어하는 나를 억눌러야 하는 "억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억압하니 내 마음과 정신이 아프지 않을 수 없고,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관계가 힘들어지는 것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저의 경우는 이런 내적 어려움이 무뚝뚝한 표현, 무신경함, 걱정과 불안, 우울 등으로 나타나 결국 사람들과도 눈에 띄지 않는 거리를 두는, 뭔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남과는 멀어져도 나와는 멀어질 수가 없더라고요.
남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내 안에 상처, 나에 대한 내 불만은 그대로였습니다.
이런 감정들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난이나 불평불만으로 해소하면서 소중한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관계가 힘들어지면 삶은 고통스러워집니다.
고통은 저를 변하게 하더라고요.
참고, 희생하는 나에서 상황에 따라 양보하기 싫을 때는 양보하지 않는 내가 되게 했고, 욕심을 내고 싶을 때는 욕심을 내면서 나를 표현하고, 가능한 것에서는 최대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가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지금까지 지켜온 기준이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달라진 나로 인해 가족 간에도 새로운 삐걱임이 생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통의 힘은 그걸 넘어서려는 의지를 만들어주더군요.
나를 힘들게 하던 나의 기준을 무너뜨리자 관계도, 삶도 훨씬 수월하고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좀 더 여유롭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처참히 무너져 보니 알겠더라고요.
"이렇게 해야지.", "이건 하면 안 되지."식의 올바름은, 오히려 나를 가두는 틀이었다는 것을요.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남이 아니라 내가 가진 그 틀이었다는 것도 말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그만큼 나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가끔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반대로 한 번 해보시길 권해요.
청소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면 괜히 한 번 청소를 안 해보거나 어느 한 공간만 안 하거나 덜하는 식으로 살짝살짝 내 틀을 내가 부수어 보는 겁니다.
그렇게 해보면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틀을 벗어나는 일탈의 즐거움도 알게 됩니다.
나를 억눌러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없습니다.
지치고 힘든 마음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작고 사소한 틀을 부수어 보세요.
크고 멋진 이벤트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틀을 부수는 그것만으로도 때로는 살맛 나게 즐겁고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