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걷는 것>
좋은 기회로 한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음악과 미술이 함께하는 윤지원의 렉쳐콘서트'였다.
내가 본 것은 마지막 3부였던 '고상지 밴드'와 함께하는 '프리다 칼로의 삶'이 주제였는데,
공연 전 내가 알고 있던 칼로에 대한 정보는 고작 평생 그의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다 간 화가로 정도로 알고 있었고, 그렇다 보니 어째서 칼로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는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나름 깨달은 바가 있다.
'페미니즘' 이란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실 페미니즘으로 범주화하는 것도 하나의 편협된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범위를 넓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인생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감정이라는 질료를 사용한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 앞에 감정을 준거하고 활용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결코 감정을 근원적으로 다룰 수 없다.
자신에게 하나의 감각정보가 들어왔을 때 감정은 즉시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인 본능'수준에서 발생되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꿈을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원치 않는다 하여 나타나지 않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때문에 강제적으로 생성된 감정을 이성에서 받아들이고 제련한 후에 행동으로써 통제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감각정보로부터 발생된 좋거나, 싫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수많은 감정들은 이성에서 어느 정도는 순치시키거나 기만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피어나는 그 감정 자체를 틀어막을 수는 없는 문제다.
칼로는 남편 리베라가 자신의 삶에 매우 치명적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지만, 항상 그의 옆에 있고 싶어 하는 그 자기 배반적 감정을 거세하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저 리베라와의 두 번째 결혼 이후 물리적으로 부서진 자신의 몸에서 튕겨져 나온 고통 탓에 감정이 다소 분산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칼로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알고 있었고,
온전히 관찰된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한 자신을 그렸고, 그 솔직한 시각으로 정제한 순도 높은 감정을 소중히 했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금전적 이익과 사회적 교류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을 기만하며 살고 있던가?
그녀는 그녀가 결정한 삶을, 훌륭하게 살아 낸 '자기 결정권 자'이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한 남성에게 처절히 끌려다녔음에도 왜 그녀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정말 나의 낮은 차원의 사고였다.
내가 정말 애정 하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이런 대사가 있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
이것이 그녀가 페미니즘을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넓혀, 인생에 있어 수많은 선택.. 그 근본은 타인으로부터가 아닌 자신에 대한 앎에서부터라는 것이 이 글의 골자다.
그것이 밑받침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숭고한 희생이라도 억견과 확증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신이 선하다는 것'을 주변에서 익히 들어 아는 것과, 자신 내부의 인식으로부터 깨닫고 아는 것은 분명 결과는 같지만 둘은 매우 다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본래성을 제대로 관조함으로써 억견을 구분하고 참된 '에피스테메'를 취할 수 있을 때 이 온갖 괴뢰 정보가 바다를 이루는 세상에서 주체적이며 올바른 삶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