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들은 메모로써 남겨져 있다.>
1
'아둔함'과 '착함'의 차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최근 업무 중 약간의 부상이 있었다. 너무 매운 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눈에 무리가 갔더라.
퇴근 후에도 여전히 눈이 매워서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고, 눈물은 주룩주룩.. 초점은 흐려졌다.
이날 나와 같은 업무를 했던 직원은 나보다 더 증상이 심했는데..
다음날 둘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과장의 배려로 점심 후 한 시간씩 더 쉬도록 조치됐다.
동료 직원은 상태가 더 좋지 않으니 추가로 16시부터 퇴근 때까지 더 쉬었다.
이튿날, 점심식사를 막 마쳤을 때, 아직 점심시간이 30분이나 더 남았는데 갑자기 그 직원이 홀로 업무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과장(사장 아들)이 왜 점심시간인데 쉬지 않고 일하느냐 물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어제 많이 쉬었으니 왠지 일을 더 해야 할 것 같았다"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나서 옆에 서 있던 나는 단전에서부터 집약된 실소가 내면에서 터져 나왔다.
경험적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미련한 걸까, 아니면 착한 걸까, 과연 성실한 것일까...
사측에서 하루 종일 매운 공기 가득한 실내에서 작업을 하도록 지시했으면, 업무 중간마다 직원의 컨디션과 안전 관리를 하지 못한 '관리자의 소홀한 책임' 있는 것인데...
2
위에 이어서...
어쩌면 사장이 직원을 '가스 라이팅' 하는 것이 아닌, 역으로 직원이 사장에게 '가스 라이팅'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골이다 보니 일이 많은 성수기에는 젊은 인력이 종종 부족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사장은 간헐적으로 필요시 언제나 대기 중인 할머니들을 부른다.
이곳 시골에 귀촌한 후부터 종종 목격되는 지점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도 할머니들은 사장이 부르면 본인 스케줄이 미리 있었음에 불구하고,
사장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출근하시는 분들이 꽤 많더라.
그 이유는 놀랍게도 사장이 무서워서...
이런 어이없는 노동의 실추는 아마도 뿌리 깊은 남성지배적 역사에서부터 이어져 온 현상일 것으로 보여지는데, 도무지 그 깊이는 어디부터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출근해 주었지만, 사장은 그저 당연한 일상 중 하루다.'
3
같이 일하는 직원 중 한 명은 순전히 나의 일방적 판단이겠지만..,
정말 완벽한 '신체형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 개체가 이다지도 신체화 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는 베트남에서 태어났고, 여성이다.
굳이 여성이라며 언급한 이유는 남자든 여자든 '신체적 성향'에는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인물이 얼마나 신체형 인간이냐면...
일단 정말로, 미친 듯이..
마치 헤라클레스나, 삼손쯤 되는 신체 타입의 신들의 축복 샤워를 받은 것처럼 일한다.
그저 당일 안에 끝내면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관리자가 그렇게 지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런 지시와 선택지는 무의미하다.
강렬히 타오르는 불빛 앞에 선 불나방처럼 달려들어서, 무지막지하게.. 그리고 우사인 볼트보다도 빠르게 일 한 나머지, 마치 시간의 경계마저 뛰어넘겠다는 그 어떤 의지의 발로가 한 명의 인간으로 현현하고 체화되듯...
'굳이 오늘 하지 않아도 될 내일의 일까지 끌어당겨서 한다.' (분명 이건 초월적 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현재의 일이 끝나면 미래의 일을 찾아다니는 사바나의 굶주린 한 마리 하이에나다.
참으로 그와 함께 일하는 직원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다.
오늘 일을 빠르게 끝내도 우린 퇴근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귀촌한게 아닌데..ㅜ)
가장 문제인 것은 그가 업무량의 수준을 높인다는 거다.
그가 최선을 다해 빠르게 끝내면 끝낼수록, 사장이나 관리자 입장에서는 산술적으로 주어진 시간에 이만큼의 일을 끝냈으니, 다음번에도 같거나 더 나은 수준을 바라게 될 뿐인 것을...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전에도 충분히 해냈으니까...
누적되어 갈수록 그것은 점점 평균치가 되는 거다. 그러다 어느 날 다른 직원이 동일한 시간 내 끝내지 못하면 그 직원만 이상해지는 것이겠지.
어떻게 보면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그게 아니라면 참으로 이기적인 직원이 아닐 수 없다. 주변을 무시하고 자신의 성격대로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직원이 사장을 가스 라이팅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래....... 맞아 내가 이런 '초 신체형 인간들'의 흔한 성향을 꽤나 알고 있지...
언젠가 내가 혹시나 싶어 그 신체형 직원에게 질문을 해본 적이 있었다.
"주말에 약속 없이 집에 있을 땐 혹시 계속 잠만 자는 거 아니죠?"
아니다 다를까? 대답은 역시나...
밖에서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은 단지 내 경험상의 판단이지만, 대체로 실내에 머무르고, 어떤 행동적 근거와 당위를 잃게 되면, 그동안 스스로 길러왔던 직진의 방향과 관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현실의 회피적 수단으로 자신도 모르게 잠이 오는 거겠지.
조용히 앉아 책을 읽거나, 온전히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하거나, 조금은 깊은 사유를 하는 행위는 그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
4
이것도 위에 이어서....
사람의 '결'이라는 것은 상당히 유기적이라서, 보통 위에서 언급된 '신체형 인간'의 특징을 가진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서도 비슷한 '결'로써 행위한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성향/타입'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겠지.
당연하겠지만, 그가 듣는 음악적 취향은 너무나도 예상대로였다.
'심장을 조이는 강렬한 비트와, 한없이 드높은 BPM'
어느 평화롭던 날 그는 내가 듣던 음악을 듣고서는 말했다.
"00 씨가 듣는 음악은 잠이 와요~ / 00 씨 음악은 슬퍼요~"
좋아..그렇다. 잠이 온다는 것은 뭐 그렇다 치자,
하지만 슬프다는 것은 비동의.
왜냐하면, 그저 조용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슬프다'와 '조용하다/차분하다'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것에 적지 않게 놀란 적이 있던 게..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문득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이 학생들에게 금지시키는 단어가 있다고 했다.
'짜증'이라는 단어였는데, '짜증'이라는 단어가 뭉개버리는 갖가지 감정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라 하더라.
슬퍼도, 서운해도, 서러워도, 배가 고파도, 섭섭해도, 어려워도.... 이다지도 많은 감정들이 하나같이 '짜증'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왜 좋아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종종 시간을 들여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의 감정적 상태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의 발견과 더불어 자신의 '본래성'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어떤 부류의 그들은 그런 걸 굳이.. 왜 알아야 하냐며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5
인터넷을 하다 보면, 정의구현을 핑계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의도를 강렬히 느낄 수 있는 글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인터넷 세상에서만 보면 사람들의 도덕성은 이토록 높은데, 그런데 왜 현실은 시궁창일까?
6
니체의 글 중 이런게 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한 개인이 인터넷으로부터 수많은 발언권을 갖게 된 요즘 같은 시대에 공감되는 문장이더라.
정치적이든.., 사회 인권적이든.., 너무 빠져드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활동은 "자신의 감정과 삶은 지키는 선에서..."
7.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만 해도 제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패기(?) 넘치던 시절이었다.
긴 세월이 흘러 또다시 본 영화.
우리네 현실도 영화에서처럼 개인의 삶과 그 속에 산개된 모든 만남들은 비가역적이다.
이미 실행되어버린 만남은 다시는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사실만으로도 모든 만남은 대단히 실천적이며 가없이 아찔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새로운 만남은 추가되지 않고, 나의 만남의 역사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단지 관계가 변용될 뿐, 만남의 르네상스는 오지 않는다.
8
누가 뭐래도 '노력'이라는 것은 자신의 중력으로부터 이탈되는 역학이므로, 섭리 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노력은 '이질'이며, 자신의 '비 본래성'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노력을 당연시 여길까?
9
사실 인간관계에 조금씩이라도 신경 쓰고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 안에 타인을 패턴화시켜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지 않는가?.
다만 타인에게, 아니면 스스로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티를 안 내려고 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