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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사회를 향한 개인의 포착 [생각]

<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by 춘고


대선 이후 현재까지 사회로부터 받았던 느낌들을 나름 메모해두었는데, 그렇게 포착한 생각들을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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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선.. 개인적으로 바라던 후보자가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이번 대선 결과에 관하여 정신승리를 조금 해 보자면, 우리는 언제나 선거철만 되면 두 집단의 경계로부터 혼란의 카오스를 경험하고, 정권이 교체되기라도 하면 기존 여당이 수행했던 체제는 새로운 여당에게 과감하게 부정되는 매우 허무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마치 현타가 온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한 걸음 물러나서 사태를 바라보면 이 얼마나 한심한 상황인가?

차라리 독재나 엘리트주의에서는 이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사태는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은 차마 무리일까?

하지만 이것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민주주의의 속성인걸 어떡하나, 매번 선거 때마다 정국은 혼란하고, 언제나 국회에서는 여야가 불구대천지 원수라도 만난 듯이 적대하며, 시민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대립하고, 분할되는...

그럼에도 어쩌면 이 혼란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속성 상 매우 건강한 표징이라 볼 수도 있으며, 이러한 정당의 대립구조는 민주주의의가 지향하는 정상궤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독재의 침묵보다는 혼란의 민주주의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편으로 정권이 바뀐 이 현실이 뭐가되었든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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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젠더 갈등은 이번 대선의 양극화된 결과로부터 다시 한번 증명되었고, 양극화는 필연적으로 승리와 패배의 내재율을 가진다.

이 결과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보자면, 아마도 일종의 한국사회의 레거시로서 그동안 남성이 가졌던 자존감의 관성, 남성 중심적이었던 사회적 위계가 여성에게 분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부감 등

본능에 의한 방어기제가 혐오적 형태로 가공되어 표출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정치권에서 대놓고 표심으로 이용하였다. 결과적으로 혐오의 투표였음을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반면에 여성들은 오랜 세월 사회의 억눌림으로부터 연대된 감정들이 최근에서야 비로소 주목할 만한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고, 장구한 억압의 역사를 극복하고 현재보다 더 나아질 미래를 기대하며 투표했다.

이다지도 서로의 간극은 너무나 크다.


부유한 가정이 아닌, 평범한 젊은 남성들이 보수정치권에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성가족부를 비롯 여성 연대의 해체? 그리고 만약 그러한 기관들이 해체되고 나면 다음은 무엇을 바랄까?

이번 보수권의 홍보 전략 중 SNS를 이용한 ‘여성가족부 해체’라는 밑도 끝도 없이 단 '일곱 글자'

처음엔 그 허술함에 실소도 나왔지만,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면 매우 전략적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밑에 부연적인 해체의 이유라도 달았다면 어떤 근거에 의한 해체의 필요성의 '논리'로서 인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명쾌하게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의 전략을 취함으로써 순수 이념을 앞세웠다. 이토록 간계할 수가..


많은 이념은 ‘슬로건’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간 수많은 집회 때마다 혁명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 과정에서 불가결한 것이 바로 '슬로건'일 것이다. 집회에 자주 등장하던 ‘이게 나라냐?!” ‘탄핵하라!’등의 슬로건이 적힌 피켓을 들고 모두가 한 목소리를 외치다 보면 종종 ‘위상의 전이’가 일어난다.

근본적으로 혁명을 야기시킨 수많은 사건과 서사들은, 집회의 성격이 격해지고 감정의 진폭이 늘어남과 동시에 사람들의 커져가는 외침은 조금씩 슬로건의 '이념'에 수렴되며, 그 짧은 슬로건 몇 글자가 어느 순간 집회의 ‘주’가 되고, 본래 원인이었던 사건(서사)은 ‘부’가 되어버리는 위상전이, 즉 일종의 ‘시뮬라시옹’이 실현된다.

마치 십자가 그 자체가 어느새 숭배할 신이 되어 버린 것처럼, 예컨대 탄핵으로써 심판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목적이 침식되어, '탄핵시킴' 그 자체가 주 목적이 되어버리는...


일종의 슬로건 같은 ‘여성가족부 해체’라는 단 일곱 글자는 실로 많은 것을 호도하고 선동했으며, 첨예함을 가중시켰다. 마치 부푼 풍선에 바늘을 댄 것처럼. 지역 갈등에 이어 또 하나의 혐오가 국민의 선거로서 ‘공인’을 받은 셈이다.


그래도 한편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 건, 선거로써 젠더갈등이 극명하게 가시화된 사실적 의미는 젠더 갈등이 공동 사회문제로서 ‘정식화’가 되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즉, 해결해야 하는 사회적 과제의 우선순위로 상승되었다는 것이고, 이 효과는 의외로 긍정적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방치하거나, 미뤄두었던 많은 젠더 갈등의 파생적 문제를 이제부터라도 사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들거나, 적어도 큰 글자로 받아들일 것이고, 사람들의 인식은 이전과는 같아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불합리, 불평등의(특히 여성들의) 해결이 일어날 것이라 나름 예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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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남성들은 어째서 보수정당에 표심을 주게 되었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직 많은 것을 모르지만 그럼에도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을 해 보면, 그 이유는‘소외’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시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사회의 거대 담론들이 있다.

노동자/자본가의 담론, 지역(출신에 따른) 담론, 청년과 중장년 연령차의 담론, 그리고 젊은 여성부터 장년의 여성까지 여성성을 기반으로 하여 연령의 큰 구애를 받지 않고 형성 가능성을 지닌 페미니즘의 신담론.


이러한 담론에 포함되지 못한 소외된 계층을 찾아보면 아마 ‘청년 남성’ 일 것이다.


내가 보는 시야에서 사회는 청년 남성들을 포용할 담론이 특별하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작금의 현실인 듯하다. 디아즈포라 즉, 각자도생으로 흩뿌려진 청년남성은 여성의 페미니즘처럼 사회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온당히 주장할 만한 채널이 없어 보인다.


그들이 각자도생 하는 사이, 여성들은 서로 연대하고 페미니즘은 조금씩 거대해져 갔으며, 조금씩 사회는 페미니즘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동시에 페미니즘의 말에 점차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많은 방송매체와 정치권에서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요한 점은, 여전히 사회는 남성으로 저울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지만, 세대가 내려감에 따라 저울의 각도는 조금씩 평행에 가까워지고 있는 방향성은 인정해야 한다.

경험적으로 할아버지와 손자를 비교했을 때, 둘 사이에 선명한 젠더 감수성의 차이를 가진다는 것은 인지해야 한다.


최근의 2030 남성들은 젠더의 불합리적 차별성에서, 과거 세대에 비하여 상당히 희미해진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동시에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 대두되며 과거보다 비약적으로 여성의 목소리에 많은 힘이 실리는 것을 방송과 인터넷 등에서 목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2030 젊은 남성들이 가지는 인식은 어렸을 적부터 여자 아이들과 큰 차별 없이 평등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라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와보니, 여성들은 사회의 불평등을 주장하며 변화를 촉구하고, 나이가 많고 적음의 세부적인 구별 없이 ‘남성’이라는 통칭적 단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규탄한다.

동시에 젊은 사회 초년의 남성들은 눈앞에 놓인 ‘군 입대’에 좌절하거나 그 자체를 불평등으로 인식하게 되고, 더불어 ‘군 가산점’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워질수록 '군 가산점'과 군대에서 소요되는 시간은 분명 그들에게 대단히 큰 이슈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문제니까 말이다.


젊은 남성들은 사회 전반에 펼쳐진 역사적 맥락(여성의 불평등의 역사는 매우 깊다는 사실) 파악은 할 새도 없이,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눈앞의 사건들에 의하여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고, 그러한 이성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혐오가 채워지며, 혐오는 자기 동일성을 가진 혐오로 수렴되며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물론 그들 남성도 시간이 더 흘러 결혼하여 배우자가 살아왔던 삶까지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을 가지게 되거나, 또는 나이가 들어 삶의 경험치가 누적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여성의 '유리천장'을 비롯한 여성에 관한 사회의 다양한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게 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문제에 지배당하지 않는가?


분명 내가 쓴 이 글은 스스로 남성으로서 남성을 대변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런 혼란 마저 '완성형'으로 작동되고 있어서, '사회'라는 이 비극에 새로이 발을 들이는 사람은 태생적으로 미완을 가진 어리고 젊은 친구들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와중에 한 거대 정당이 그 소외된 공허함에 혐오를 채워 표를 구걸했다.

한 나라를 이끌겠다는 정당이 집권을 위해 실행한 행위로 볼 때, 적절치 못함은 자명하다.


드라마 소년심판에 심히 공감되는 대사가 있었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단이 타락하면 목적 또한 오염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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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도 젠더 갈등을 여전히 실천 중이다. 이성(logos)의 미성숙함도 이유가 되겠지만, 남성이라는 자기 완결성의 경계에서 비 자율성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사회가 가없이 남성 중심적으로 흘러간다 해도, 개별적인 수많은 사례 중에는 남성이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나도 그리고 나와 성별이 같은 당신도.., 반추해보면 그런 경험 몇 개쯤은 소환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개체는 너무나 많고, 하나의 개별자는 자신만의 소우주를 가졌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의 중심에서부터 빅뱅이 일어났다.

이것은 하나의 닫힌 '계(界)'를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의 '계'를 넘어서는 영역은 오로지 정보와 감각을 기반으로 ‘추측에 의한 판단’의 영역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삶이라는 한정된 기한 동안 자신의 신체를 넘어선 외부는 끝내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이는 칸트의 경계 철학에서는 영역 밖 <물자체>의 세계, 에반게리온에서는 <AT필드의 너머>로 규정지어진 관념적 세계관으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당신과 내가 다르다는 이유, 하지만 그 다름의 근원을 알 수 없는 것에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또는 관성적으로 의식 너머 관념의 땅, 즉 타인과의 교류를 원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의식이라는 '절대 장벽'에 가로막혀 그 너머를 볼 수 없고, 그 닿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열망으로서 인간 개체는 생식적인 유전자의 융합을 바라 왔을지도 모르겠다.


'아서 클락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을 보면 '오버 마인드'에 의한 인류의 진화로써 '신인류'의 제시를.. 유년들의 정신과 신체의 공유/합일을 통하여 실행한다.

헤겔 철학은 정말 잘 모르지만 그의 철학 중 ’ 절대정신, 세계정신’은 주체와 객체, 물질과 정신, 존재와 인식을 변증적인 방식을 통해 근본에서부터 사유하고, 모순을 극복하여 ‘정반합’으로 나아가는 일류성에 대해 말하고, 자크 라캉은 ‘욕망 이론’을 제시하며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종속시키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제시한다.


이렇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주체와 객체 / 자아와 타인"에 대한 탐구를 성실히 해나가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발굴된 자존으로부터 외부를 규정하고 탐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외부세계를 규정하려 애쓰고, 탐지하려는 노력은 결국, 객체를 가능한 첨예하게 규정 지음으로부터 '자신의 온전한 자아'를 분리해내고, 그 과정에서 온전히 분화된 자신의 자아로부터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보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젠더 간의 갈등도 결국 "자아와 타인 / 주체와 객체"의 하부에 속한 큰 문단일 것이고, 우리가 반드시 짚어야 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영화 <트랜센던스>나, <공각기동대>처럼 개인의 의식을 확장되고 개방된 공간에 업로드하지 않는 이상, 닫힌 의식의 계(界)로부터 놓여 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철학과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가장 먼 '곶'을 찾아 그곳에 등대를 세우고 관망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 즉,' 타인과의 관계'로서 여성과 남성을 객관적 차이에서부터 이해하고, 상호간의 마찰계수를 지혜롭게 풀어 나갈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를 지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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