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나의 발목을 잡는 것만 같나요?
나는 무더운 여름의 정오즈음, 내 부모님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더운 여름 날씨에 출산의 흔적이 채 아물지 못한 채로 내 엄마는 정성스레 나를 먹였고, 직업군인이었던 내 아빠는 온 몸이 젖을 만큼 땀을 흘리며 내가 씻을 때마다 물을 두 세 번이나 갈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툰 애정을 듬뿍 담아 세상에 내놓은 나는 여름을 꼭 닮았다.
나는 여름에 보석처럼 빛난다.
이르게 들어서는 태양빛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을 느끼고 가벼운 옷차림은 동력이 된다.
축복이라도 받은 것인지 땀도 별로 안나서(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종종 누군가가 묻곤 했다.
덥지 않으세요? 왜 땀이 안나요?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여름이 덥고, 여름에 엘리베이터와 같은 밀폐된 장소에 가는 것은 곤욕이며, 여름에 들끓는 모기나 벌레는 내가 혐오하는 것 중 하나이지만 그것은 여름의 극히 일부일 뿐 여름이 주는 청량함을 이기지 못한다. 여름은 그야말로 사람의 인생에서 청년기에 빗댈 수 있을만큼 확실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와 반대로 나는 겨울엔 좀처럼 아름다울 수 없다.
차가운 날씨와 색감이 탁한 풍경은 나의 생각을 얼어붙게하고 따뜻한 것을 찾아 헤메이게 한다. 여름 햇살과 습도에 반짝이던 내 피부는 퍼석해지고, 많은 활동량에 탄탄하던 내 근육은 적어진 생활 반경을 따라 줄어들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고열량 음식으로 인한 지방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제 아무리 좋은 기술력으로 만들어 가벼운 외투를 입는다해도 그 무게감에 금새 지치며, 불어오는 바람에는 뼈가 시린 것만 같다.(놀랍게도 10대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인지 늘 주변 사람들에게 듣던 말이 있다.
"따뜻한 나라로 가서 살아."
실제로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20대 후반의 나는 미련 없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떠났다.
호주!
꿈에서 바라던 환경이었으며 따뜻하고 좋은 환경때문인지 사람들도 밝고 단순했다. 백호주의의 가호 아래 나도 흔한 인종차별이야 몇 번 겪었지만 그것은 골드코스트 해변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자면 다 잊혀지는 것이었다. 나는 하이킹, 서핑, 와인 등등 호주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닥치는대로 즐기기 시작했고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호주를 내가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나는 점진적으로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20살때 이후로 혼자 살아왔으며 생활력이나 상황적응력이 무척 뛰어난 편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의 이민 계획을 크게 말리지 않았다. 현재 영어로 먹고 살고 있을만큼의 영어로 된 의사소통도 가능하다. 나는 신은 하나이지만 그를 부르는 이름과 섬기는 방법이 종교마다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는 널널한 사고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에 살았던 내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던 이질적인 마음이 늘 나의 감정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이를테면 ‘괴롭지 않은데 괴로워….’
점점 자신감도 떨어지고 누군가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는 일마다 수월히 풀리는 것이 없었으며 바다와 햇살은 내 속도 모르고 늘 반짝 거렸을 뿐이다.
최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다가 이 것을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을 찾아냈다.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나는 호주에 가기 전 내 8년간의 자취생활을 8개의 박스로 정리했다. 내가 살던 반지하 집의 주인아저씨와 전세금을 가지고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아 급하게 이사를 나가야하는 상황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짐이 4인 가족보다 많은 것 같다는 엄마의 말도 안되는 핀잔을 들으며 나의 감정이 묻은 물건과 흔적을 줄이고 줄여 상자에 담았다. 소중한 인연들과도 서둘러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8년 내 모았던 나의 재산까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엄마한테 맡기고 용돈을 받아 쓰는 것으로 합의를 하고서 호주로 떠났다. 꿈에 그리던 타국으로 떠난다는 기대감에 나는 내가 무엇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한 것인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JK롤링의 <해리포터>에서 악당인 볼드모트는 불멸의 방법으로 특별한 물건에 자기 영혼의 일부를 담아 봉인한다. 자기 육신의 실체가 없거나 공격당한다 하더라도 그 물건을 통하여 다시 소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호크룩스'라고 불리는 이 물건들은 결국에는 그의 약점이 된다. 주인공에 의해 그 물건이 파괴될수록 그의 영혼 자체가 부분적으로 찢어져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해리포터 세계관에서 금지된 최악의 마법이라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나는 제발로 호크룩스를 만들어 낸 꼴이었다. 몸은 행복했지만 마음의 안정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독립적이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믿음, 자기애가 있었는데 이것은 나 혼자서 가지게 된 감정이 아니었다. 내가 이룬 것들, 내가 대출받아 마련한 나의 집, 내 재산, 나의 애정이 담긴 옷방, 내가 직접 고른 그릇, 내가 키우는 식물, 나의 친구들이 배양원료가 되어 나의 자기애는 유기체로서 자라나게 된 것이다.
타국이라는 허공에서 안전하게 걸으려고 짐을 덜어내었더니 거기 구명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름에 돋보이는 나는 여름 나라에서 누구보다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은 내 오만이자 오판이었다. 나는 한국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나의 소중한 관계에서 힘을 얻는 사람이었으며, 호기심과 강한 생명력은 내 일부였을 뿐 내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기회를 잡으려는 욕심을 냈던 것이다.
나를 구출하려면 나는 다시 배양토를 만들어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 하던 일과 관련된 학과가 있는 대학을 알아보았고, 영어로 수학공부를 해야 했다. 거기서 만난 인연을 다시 소중히 보듬어서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열을 올려야 했다. 또 내가 모은 돈을 받아내는 것임에도 엄마에게 학업계획서까지 보내야 했다. 결과적으로 판데믹과 가정사로 인하여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돌아오고 나니 호주는 나에게 제 2의 고향처럼 여겨지며, 가끔 호주에 사는 친구와 영상통화를 할 때면 창 뒤로 보이는 풍경에 눈물이 핑 돌만큼 그립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안온함 속에서 느꼈던 무력감과 고독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상황이 나를 도와주지 않아서 내가 우울했다 생각했는데 사실 그 상황은 나의 선택과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내가 피할 수 없을 미래였던 것이다.
한국을 떠나지 말라는 말도, 타국에서 살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이동 결정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바른 방향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가서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무엇을 해야할 지 알 수 있다. 하루하루, 해야할 일(그것이 휴식이라고 한 들)이 있는 오늘을 사는 것은 사람에게 참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일부만을 보고 나는 ~한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며 나를 내던지는 행동은 어린 날의 나 뿐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호주에서 한인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도는 말이 있다.
'호주는 지루한 천국이고, 한국은 재밌는 지옥이야.'
호주의 많은 식당이나 가게들이 3-4시부터는 가게문을 닫기 시작해 저녁 식사 이후로는 딱히 할 일이 없어져 버리니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