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처한 감옥을 살다보면
어느 주말, 좋아하는 배우인 안내상이 출연한 단만극 <루왁인간>을 보다가 영화 <은교>가 떠올랐다. 내가 20대 초반이던 시절에 나왔던 영화인 <은교>는 그 소재부터 시작해서 주인공 박해일의 분장까지 충격을 주었던 영화였다. 어리고 예쁜 여고생을 사랑하는 노년의 시인인 이적요(박해일)가 자신의 사랑과 과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일갈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그의 저의, 아름다운 젊은 날에 대한 갈망을 이해하지만 어린 여자아이에게 욕정을 품는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기 위한 저열한 변명 혹은 궤변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이고 살면서 무수히 많은 성추행을 당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진심보다 외설적인 욕구에 대한 비난의 심정이 터져 나왔다. 정확히 그 뒤로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루왁인간>의 정차식 부장(안내상)이 고통 끝에 마침내 평안을 찾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흘렀다.
정차식 부장은 대기업에서 하루 하루를 근근히 버티며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 공무원 발톱까지 깎아가며 젊은 날을 회사원으로 성실히 살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별명이 펫차식(높은 분들의 개), 폐차식(한물간 차) 부장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의 전성기는 지나갔으며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뼈저리게 느끼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엄습한다.
30대 초반, 사회생활 9년차인 나는 한번도 후임 교육을 해보거나 장을 달아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누가 누굴 걱정하고 동정해, 라는 입장이지만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30대가 되었기 때문인지 정부장의 떨어진 구두 뒷굽이 너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시절 이런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적당히 살다가 30살이 되면 그냥 죽어야지, 하고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되는 발상을 했다. 고민 많고 인생이 마냥 즐겁지 않았던 사춘기 아이의 반항적인 망언이다. 지금의 나는 벌써 만으로 30년하고도 5개월을 넘게 살았고 20대 때처럼 여전히 해보지 않은게 많아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사람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내 인생에 쿨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간사에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되는 사실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사람은 누구나 입체적인 면이 있어서 한 사람을 차분히 관찰하다보면 그 사람을 한 단어나 한 성향으로 명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이 부족할 수 록 누군가를 한 마디로 평가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학습하면서 성장하며, 그 학습은 주로 경험을 통해서 넓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나이일수록 폭넓게 생각하여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 잘 풀어 설명해준들 경험해보지 못한 사실은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 세대간의 격차란, 라떼는 여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말해주려는 사람과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간의 전쟁.
결국 모두 한 점으로 나가고 있건만.
그 한 점으로 가는 길이 사람마다 다를 뿐인데.
커피체리를 먹고 벼락같은 고통을 겪으며 사향고양이처럼 루왁커피의 생두를 만들 수 있게 된 정차식 부장, 루왁은 비싸고 잘 팔리는 커피라며 기뻐하던 딸이 어느 날 현지에서는 사향고양이가 이를 위해 학대당하고 있다면서 더이상 루왁커피를 팔지 않겠다고 하자 딸에게 말한다.
"고양이는 학대 당한다고 생각 안 해.
자기 똥이 돈이 되어서 기뻐."
우리는 어릴 때부터 꿈을 갖기를 종용당한다. 나는 '화가'였다가 '동물병원 의사'였다가 엉뚱하게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써내기도 했었다. 미디어에서 크게 노출되는 직업에 따라 대통령이나 우주비행사같이 거창했던 꿈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현실과 타협하여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 수준으로 좁혀진다. 상당수는 어릴 적 꿈과는 다르게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라면서 적당한 배우자를 만나 무난한 가정을 꾸리고, 무난한 회사에서 무난한 월급과 무난한 대출을 끼고 살아갈 것이다. 사실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여러 경험 끝에 본인이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은 마음 한 켠에서는 알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의 인생이 결국 내 선택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솔직한 것이 미덕이라지만 지나치면 무례가 되는 세상이기에 사실 애정어린 참견보다는 캐묻지 않는, 따뜻한 무관심이 적절한 때가 있다. 그런 묵묵한 응원이 그 사람이 자기 삶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왕에게 직언을 했던 충신들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마음 한 켠에서 나 스스로에게 직언을 하는 누군가를 유배보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언젠가는 수도로 불러와 마주해야할 충신의 말이라도 당장 내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쿨하지 않아도 괜찮다. 저 밖의 세상도 마냥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은 아니니 흘러가는 시간이, 내가 포기한 것이, 마음에 좀처럼 들지 않는 여유가 아쉬워 잠이 오지 오지 않을 때 괜찮다고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고 스스로를 쓰다듬어준다면 좋으련만.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의 언행이 이해가지 않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곤 했다. 최근에서야 깨닫게 된 사실인데 나 스스로 나에게 너그럽지 못하니 남에게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머릿 속에 있는 나의 주관적(상식이라 주장하면서) 기준으로 나의 행동을 재단하고, 남의 행동을 재단하고... 그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니 고치거나 평가하기보다 그냥 그렇구나 넘겨버리고 만약 계속 봐야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불협화음없이 문제를 해결을 할까 정도로만 접근하면 좋았을텐데. 나를 위해서.
나의 그릇된 행동도 자책하며 우울감을 느끼기보다 (나 스스로로 계속 살아가야하니)내가 여기서 어떤 것을 배워서 다음에는 좀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발전적인 생각 혹은 살다보면 그럴 때도 있지, 그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위안을 가지는 것도 좋았겠다. 나를 위해서. 나이가 들어 스스로를 보듬지 못하고 팍팍한 사람으로 늙어간 것에 대한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도 상도, 벌도 아닌 이 삶을 내 선택으로 살아가다 힘이 들 때 스스로에게 말해주었으면 한다.
쿨하지 않아도 괜찮다고.